매일신문

[매일춘추] 무협지

▲박지형
▲박지형

무협지를 보다 보면 가끔 리얼리티의 부족에 화가 날 때가 있다. 인간이 수면 위를 답보하고, 허공을 격해 혈을 짚고, 그런 설정 때문이 아니다. 그런 판타지야 그 세계관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큰 거부감 없이 넘길 수 있는 허풍이겠지. 문제는 이거다. 장풍으로 능히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초인들이 설쳐대는 중원 대륙이 어째서 항상 금이니 원이니 하는 이민족들에게 나라를 뺏기느냐 말이다. 소설의 설정 상 그 호인(胡人)들은 허공을 격하기는커녕 혈도가 뭔지도 모르는 백치들인데 말이다.

무협지 짬밥 어언 20년, 내가 세워 본 가설은 이러하다. 일단 먼저 중원은 무사가 되지 못하면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문화적 풍토를 가지고 있다. 사람이 농, 공, 상의 진로를 택하게 되면 호된 '갑질'의 희생양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몸소 겪은 중원의 부모들은 그래서 모두 아이들을 소림, 곤륜, 아미 즉 SKY파 도장에 집어넣으려고 혈안이 된다. 이들은 아이가 걸음마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사재를 탈탈 털어 18반 무예를 고루 익히게 하는 한편, 심지어 금기서화 시사가무까지도 기본기 정도는 가르쳐 둔다. 아이가 비무만 잘하고 풍류에 문외한이면 매력이 없잖은가?

이렇게 길러진 아이들은 결국 무학 서열에 따라 9파1방에 차례로 입문하게 된다. 문제는 들어가고 싶은 아이들은 많지만, 명문정파가 그들을 다 사사할 수가 없어 새로운 방파들이 난립하게 된 것이다. 이리하야, 소위 방문좌도의 '지잡방'들까지 무사들을 배출하기 시작하니, 중원은 드디어 태어나는 아이들의 5분지 4가 무사가 되어버리는 사회적 주화입마(走火入魔 )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무사가 너무 많으니 이제 이들이 다 활약할 만큼의 무림이 있을 리 없다. 예전에는 일양지 정도만 익혀도 표국에 취업이 됐었는데, 이제는 일양지는 기본에 역근경, 태극권, 건곤대나이를 다 익혀도 될까 말까. 이윽고 소림 출신의 한 사부가 쓴 "아프니까 무림이다"같은 서책이 잉여무사들의 위안이 되기 시작한다. 구조적으로는 더 심각한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 농, 공, 상에 종사할 사람이 없다 보니 나라 전체의 생산성이 떨어진다. 외적이 침입해 왔을 때, 졸오에서 싸울 사람도 거의 남아나지 않는다. 그래서 사졸을 수입해서 쓰는 지경에 이른 한장(漢將)의 관(關)은 이제 거칠게 뭉친 호마(胡馬)의 월령(越領) 앞에 무너지는 일 뿐.

만약 이 가설이 그럴듯하다면 무협지의 현실성은 생각보다는 괜찮은 편이다. 문제는 현실이 왜 이렇게 무협지같냐는 것. 현실은 소설이 아닌데, 왜 우리는 여태껏 농, 공, 상 양민들의 허무한 죽음을 외면하고, 번들거리는 무사의 '갑(甲)'만을 동경해왔냐는 것.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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