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위 선생이 무장 독립투쟁에 나섰을 때 집안의 맏형이자 종손이었던 허훈은 3천 마지기 땅을 팔아 군자금으로 내놓았다.
충효를 중시하는 성리학적 가풍 덕분에 허위 선생 집안에서는 독립운동에 모든 것을 다 바쳤던 사람이 많이 배출됐다. 허위의 형 허겸은 동생 휘하에서 활동하며 일본군이 소모전을 펼치도록 작전을 전개했다. 또한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체결 반대 상소를 올렸고, 10월에는 을사오적 암살 사건에 가담했다가 투옥되기도 했다. 1907년 허위가 연천에서 거병했을 때 다시 의병에 참여했다. 허겸은 1912년에 허위와 허형'허필 집안사람들을 데리고 만주로 망명했다. 퉁화현에서 중어학원(中語學院)을 개설했고, 하니허(哈泥河)에서는 망명 조선인들의 자치 단체인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해 초대 단장을 역임했다. 1922년에는 고령의 나이를 무릅쓰고 국내에 잠입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86세 때 다시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벌였고, 1940년 세상을 떠났다.
허위 선생의 조카인 허형식은 1930년대와 1940년대 북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의병 지도자다. 그는 1939년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이 되었으며 1942년 8월 일본군과의 교전 중에 전사했다. 허위 선생의 조카 허길의 아들은 유명한 저항시인 이육사(본명 이원록)이다. 이육사 역시 1944년 1월 베이징의 일제 감옥에서 순국했다.
허길의 아버지 허형은 을사늑약 체결 후 1906년 을사오적 중 한 사람인 군부대신 이근택을 암살하려던 사건에 연루되어 1909년 체포되기도 했다.
허위의 아들 허학은 아버지 왕산 허위가 1907년 경기도 연천에서 거병할 때 연락과 무기 조달을 담당했다. 1912년 중부(仲父)인 성산 허겸을 따라 가족과 함께 만주로 망명해 박노창 등과 함께 김동삼 선생을 도와 동화학교를 설립하는 데 기여했다. 1913년에는 임병찬이 조직한 독립의군부에 참여하였다가 1914년 5월 동지 54명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조두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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