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독했던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독립운동을 하다가 패망한 집안이 어디 한두 곳이었을까만, 안동 권씨 부정공파(副正公派) 종가(宗家)처럼 기막힌 사연을 지닌 가문도 드물 것이다. 안동시 남후면 검암리에 있었던 이 종가는 40여 명의 노비를 거느린 천석지기인데다 대대로 관직과 학문이 남부럽지 않았던 명문가였다. 하지만 종손이 항일투쟁에 나서면서 명성이 자자하던 사대부가의 위용은 이슬처럼 스러졌다.
경술국치로 일제에 나라를 송두리째 뻬앗긴 지 2년 후인 1912년, 당시 종손이었던 추산 권기일은 의성 김씨, 고성 이씨 등 안동의 다른 사족지사(士族志士)들의 뒤를 이어 만주로 망명했다. 전 재산을 털어 만주의 항일 근거지였던 경학사와 한족회에 합류했던 추산은 1920년 경신대참변 때 신흥무관학교 인근 수수밭에서 일본군에게 붙잡혀 순국했다.
젊은 종손의 죽음과 함께 종가도 패망의 길로 들어섰다. 광복이 되자 만주에 있던 추산의 아들 형순도 꿈에서조차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그에게는 아무것도 남은 게 없었고 마땅히 할 일도 없었다. 그래서 골목길 행상으로 나섰다. 조상이 권세를 누리던 안동의 거리를 내외가 손수레를 끌고 누비며 간장을 팔았다.
전도된 우리 해방전후사의 비극을 적나라하게 웅변한 이 참담한 광경을 세상에 알린 것은 항일운동을 발굴하고 재조명해온 김희곤 경북독립운동기념관장(안동대 교수)이었다. 그 사연을 소개한 책이 바로 '독립운동으로 쓰러진 한 명가의 슬픈 이야기'였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라고 했던가. 추산의 손자로 12대 주손인 권대용 씨도 지금 안동에서 개인택시 운전을 하며 생계를 잇고 있다.
하지만 가문과 조상에 대한 자긍심을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다. 그런 대용 씨에게 을미년을 며칠 앞두고 가슴 벅찬 일이 생겼다. 안동종가음식산업화에 나선 ㈜예미정이 그에게 안동시 정상동에 새로 지은 안동종가음식체험관 건물 관리권을 위임해 준다는 것이다. 건물 일부를 종가로 사용할 수도 있게 되었으니 '종가 없는 종손'이라는 100년 한을 풀게 되었다고 느꺼워한다. 종가를 역사와 민족의 제단에 헌납한 한 명가와 종손의 비애미(悲哀美)에 한 해의 끝자락이 숙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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