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권서각의 시와 함께] 조그만 사랑 노래-황동규(1938~ )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 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환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 앉지 못하고

눈 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 눈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문학과지성사, 1978.

만해의 '님'이 연인일 수도 있고 절대적 가치일 수도 있듯이 황동규의 '그대'도 연인일 수도 있고 시인의 절대적 가치일 수도 있다. 화자는 눈 내리는 거리를 걸으며 만날 수 없는 연인을 생각한다. '어제를 동여맨 편지'는 절교의 편지일 것이다. 그에게 가는 길이 지워진 것이다. 헤어지기 전 바라보는 사물과 헤어진 뒤에 보는 사물은 같지 않다. 돌들도 침울한 모습으로 박혀 있고 저녁 하늘에는 깨어진 금이 보인다. '사랑한다'의 반복이 사무친다. 화자의 정서를 대신하는 성긴 눈은 어디에도 내리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 이보다 절절한 사랑 노래가 있을까.

이 시가 발표된 1970년대는 암울한 시대였다. 김지하가 '타는 목마름으로' 남몰래 민주주의를 쓰던 시대이며 이 땅의 지성들이 자유와 민주에 목말라 하던 시대다. 시인이 추구하던 절대적 가치는 봉쇄되고 거리는 겨울 추위로 얼어붙었다. 이 땅의 지식인과 젊은이들은 어디에도 마음 주지 못하고 성긴 눈발처럼 떠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수십 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우리는 눈발처럼 떠다닌다. 그대 무사한가. 한 해 동안 '권서각의 시와 함께' 함께해준 독자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새해엔 보다 밝은 태양 맞이하시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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