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독자참여마당] 수필-마음의 창

# 마음의 창

-장순이(대구 북구 대현남로)

주인 없는 자리에 앉아 바라본 하늘은 참 청명하다. 세찬 겨울바람에 맞서 잎사귀 다 떨어뜨린 감나무 한 그루가 마당을 지키고 서 있다. 감나무를 보고 서 있다 보니 꼬리를 휘휘 내저으며 가는 소와 지팡이를 짚은 아버지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우리 집 풍경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다만 이 자리를 지키던 주인이 하늘로 떠났다는 것 외에는 한가로운 오후다.

아버지는 항상 이 자리에 앉아 계셨다. 아버지는 중풍으로 거의 40년을 병석에 누워계셨다. 몸의 오른쪽은 마비되어 움직일 수 없고 모진 목숨이 끊어지기까지 이 방 이곳에 항상 기대어 계셨다. 벽지에 아버지의 형체가 묻어날 때까지 아버지는 이곳에 앉아 한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셨다. 아버지께서 떠난 지금 이 자리에 앉아 보니 그 이유를 알 것만 같다.

시선이 가닿은 곳에 바로 창이 있었다. 나무방문에 서툰 톱질로 낸 네모난 자리에 유리를 끼워 마감질한 투박한 창이 있었다. 그 창 너머로 세상이 보였다. 창이라고 말하기에도 서글픈 이 유리창은 엄마가 아버지를 위해 손수 만드신 것이다. "내가 밭에 가면 혼자서 얼마나 심심허것냐, 요렇게라도 해두면 바깥세상 구경 좀 할란가 싶어서…." 사십 년 간병에 당신 몸 바스러지는 줄 몰랐던 엄마의 선물이었다.

아버지는 이곳에 매일같이 앉아 아마 엄마가 오기를 기다리셨던 것 같다. 몇 년 전 산에 땔감 주우러 간 엄마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자 아버지께서 전화하셨다. 우리는 온 산을 뒤져 눈 속에 쓰러진 엄마를 발견했다. 다행히 엄마는 무사했지만, 그 일로 엄마가 그동안 치매를 앓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버지께서는 이미 엄마의 병을 알고 계셨지만 두 분이서 아니 자신이 감내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셨다. 아버지가 쓰러지시고 난 후 지금까지 엄마는 아버지의 병수발은 물론 오 남매를 책임지셨다. 여자의 몸으로 힘든 농사일이며 집안 살림을 돌보셨다. 그런 아내를 건사하는 것이 이때까지 자신을 대신하여 가장이 된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수고에 대한 보답으로 여기셨나 보다. 그리고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치매에 걸린 엄마 걱정으로 차마 눈도 감지 못하시고 돌아가셨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금, 엄마는 옛날 아버지처럼 그 자리에 앉아 창을 바라보고 계신다. 겨울 볕에 장독은 반짝이고 올려다본 뒷산은 눈이 내려 티 없이 새하얗다. 그 산 중턱에 아버지께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신다. "이제는 이 창문 필요 없을 줄 알았는디 멧돼지가 묘를 파헤칠까, 비 오면 쓸려가지 않을까, 내 인제 이걸로 본다. 자 봐라. 너거 아부지 잘 있제?" 엄마가 아버지의 안부를 물으신다.

아버지는 산에서 엄마를 굽어보고 엄마는 이 조그마한 창을 통해 아버지를 보고 계신다. 그렇게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선 두 분의 소박한 정은 이어지고 있다. 아마 엄마가 낸 그 창은 아버지와 엄마를 연결해주는 마음의 창이 아닐까? 황혼이 내려앉은 엄마의 눈에 눈물이 일렁인다. 그렇게 아버지와 엄마는 마음의 창을 통해 여든 평생 함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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