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 자란 곳은 아니지만 대구를 고향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대구와 인연을 맺은 뒤 대구가 뿜어내는 향기가 좋아, 사람이 좋아, 아예 대구에 눌러앉아 삶의 가치를 실현하고 있는 이들은 이제는 자신이 '대구 사람'이라고 외치고 있다. 살아온 곳, 연령, 직업 등 다양한 경험을 지녔기에 이들이 대구를 바라본 시각은 대구 토박이보다 더 솔직하며 객관적이다. 대구 사랑에 흠뻑 젖어 대구 자랑을 늘어놓는데 여념이 없는 '대구가 좋은 사람들'. 매일신문은 앞으로 이들이 바라본 대구와 이들이 생각하는 대구를 시리즈로 소개한다.
◆마해영(44) 전 삼성 라이온즈 선수'현 야구 해설가 및 대경대 겸임교수
"시원스럽게 뚫린 도로, 아이를 믿고 맡길 수 있는 교육환경은 최고입니다."
2002년 대구시민야구장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6차전서 극적인 끝내기 홈런으로 삼성 라이온즈를 우승으로 이끌며 달구벌을 후끈 달구었던 주인공 마해영에게 대구는 최고의 순간을 함께한 곳이다. 부산이 고향인 그는 줄곧 롯데 자이언츠에서 활동하다 2001년 삼성으로 이적하면서 대구에 둥지를 틀었다. 그리고 현역에서 물러난 지금, 대구를 고향 삼아 살고 있다.
숱한 원정경기를 치르느라 많은 도시를 다닌 그는 대구의 교통환경을 최고로 꼽았다. 사통팔달 뚫린 도로만큼 사람들도 시원시원해서 좋았다. 높은 학구열, 그를 뒷받침하는 잘 짜인 교육 인프라는 자녀 교육에 대한 부모의 근심을 덜어준다고 했다.
◆김종부(61) NUC전자 대표
"기업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대구는 기업인들에겐 최고 도시입니다."
전북 익산이 고향인 김종부 대표는 25세였던 1978년 성공한 사업가의 꿈을 꾸며 서울에 입성했다. 그곳에서 '한일내셔널'이라는 상호를 걸고 원액기와 믹서기, 찜기 등 생활가전제품을 제조'판매했다. 그다지 큰 실적을 올리지 못하던 김 대표. 그러던 중 1988년 정부가 공장 이전 정책을 발표하자 김 대표는 대구로 공장을 옮겼다. 당시 가전부품 사업 등 경공업이 특화됐던 대구에서 승부를 내보자고 다짐한 그는 NUC전자를 차리고 제품 생산력을 높였다.
"대구시가 아낌없는 지원을 해줬어요. 신바람이 났죠. 지난해에는 520억원의 매출을 올렸고 그중 80%를 수출로 이뤄냈죠."
김 대표는 대구시가 기업의 애로사항에 귀를 기울인다고 했다. 대구는 기업 하기 좋은 도시란다. 그는 대구에서 신화를 이루고 싶어한다.
◆임웅빈(42) SSLM 인사총무팀장
"거리에서 아끼는 시간, 저에겐 경쟁력을 갖출 시간을 주죠."
서울에서 태어난 임웅빈 팀장. '지옥철' '주차장 도로', 서울에서 집 밖을 나설 때면 늘 겪는 일상이었다. 차로 출근하는 데 1시간이나 걸리고 북적대는 주차장의 빈공간 찾기도 어려워 '뚜벅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3년 전 그는 다니던 회사가 삼성전자와 합작, 대구에 새 회사를 설립하면서 전혀 생각지 못했던 대구에 살게 됐다. 처음엔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도시로밖에 여기지 않았던 대구였다. 하지만 대구는 서울과 달랐다. 늘 북적거리는 사람들 속에 끼어 살던 서울에서의 삶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여유가 생겼다.
사람도 좋았다. 무엇보다 거리에서 허비하는 시간을 아낄 수 있는 게 장점이었다. 도시철도, 버스 등 대중교통을 이용해도 쉽게 원하는 목적지로 갈 수 있었다. 잠시 도심을 벗어나면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을 바라보고, 우뚝 솟은 팔공산의 기운을 받으며 사는 낙(樂)이야말로 대구에서만 누릴 수 있는 호사였다. 그래서 식구들을 모두 대구로 불렀다.
◆김혜정(52) 대구시의원(새정치민주연합 비례대표)
"전라도 여자, 이제는 대구 사람 다됐심더."
전남 강진 출신인 김혜정 시의원(기획행정위원회)은 어느덧 대구에서 산 지 27년이 됐다. 줄곧 전라도 광주에서 살았던 그는 1986년 지금의 남편인 부산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이듬해 남편이 대구의 지점으로 발령나면서 첫 타향살이에 나서게 된 김 의원은 처음에는 두려웠다. 당시만 해도 전라도-경상도 간 뿌리 깊은 지역감정이 있는데다 유독 대구가 심하다는 말을 주위에서 많이 들어서였다. 그러나 이는 기우였다. '광주 새댁' 하며 이웃들은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로 다가왔고, 두려움을 걷어갔다. 그는 지금까지 전라도 여자라는 이유로 대구에서 차별을 당하거나 불편을 겪은 게 없다고 했다.
이제는 꼭 맞는 옷을 입은 것 같은 대구. 그는 그런 대구사람으로서 앞으로 살고 싶다. 그래서 각종 봉사단체에서 활동했고, 정치에도 뜻을 뒀다. 그렇게 대구는 온전한 삶의 터전이 됐다.
◆최우정(36) 최우정법률사무소 변호사
"구수한 사투리 속 따뜻함은 사람 사는 냄새를 풍겨요."
제주시 용담동이 고향인 최우정 변호사. 그가 아주 특별한(?) 사연으로 대구와 인연을 맺게 됐다.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연수원 생활을 끝낸 그는 일할 곳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 대한변호사협회 사이트를 뒤지던 중 서울인 줄 알고 한 법무법인에 이력서를 냈다. 서류 통과 후 면접을 보러 가려고 회사의 위치를 찾다 엄청난 실수가 있었음을 확인했다. 그 법인이 있는 곳은 대구였다.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꼬리를 물었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상황에 당황도 했다. 이것도 인연이다. 그는 마침내 대구에서의 삶에 도전키로 했고 다행히 합격했다.
벌써 4년째. 대구의 생활은 그의 선택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거친 말투 속에 묻어나는 정(情)은 고향 제주에서의 것과 같았다.
처음에는 쉽게 알아들을 수 없는 사투리와 거친 억양에 주눅도 들었다. 하지만 그 속은 온통 따뜻함으로 채워져 있었다. 대구 사람들은 한 번 인연을 맺자 더없이 넓은 가슴으로 사람을 안아줬다. 이제는 스스럼없이 대구 사투리를 구사하는 그가 "대구 데끼리라예"라고 했다.
◆티엔루루(25) 경북대 의과대 박사과정
"대구, 친구가 좋고 거리 풍경이 좋아요."
중국 허난성 정주 출신의 티엔루루 씨. 올해로 대구에 온 지 4년이 됐다. 천진의과대학을 졸업한 티엔 씨, 여행지를 찾다 대구가 '한국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이자 교육 중심도시'라고 설명된 인터넷 검색 결과를 보고 대구행 비행기에 올랐다. 오래전부터 외국에서 공부해보고 싶다 생각했던 티엔 씨는 이참에 한국 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밟아보자 다짐했고, 여러 대학에 원서를 냈다. 가장 먼저 경북대에서 답이 왔다. 그 길로 대구에 눌러앉았다.
지난해 석사 학위를 취득하자 서울의 유명 종합병원에서 러브콜이 왔지만 대구를 떠나는 게 싫었다. 대구에서 사귄 친구와의 헤어짐이 싫었고, 익숙한 대구의 거리를 벗어나는 것도 싫었다.
대구는 경주, 청도, 안동 등 중소도시와도 가까워 시끌벅적한 생활과 한적한 농촌의 풍경과 공기를 동시에 마실 수 있어 좋다는 티엔 씨는 정 많고 씩씩한 대구 사람을 만나 결혼도 하고 아이도 키우며 남은 삶을 대구에서 보내고 싶다고 했다.
티엔 씨는 매일같이 "대구, 하오하오(좋다)!"를 외친다.
◆최현묵(57) 극작가'연출가
"대구는 보석 같은 친구들이 곳곳에 숨어 있는 곳입니다."
서울에서 태어난 최현묵 연출가는 1984년 대구에 와 30년 동안 문화정책 수립, 공연 기획 등의 일을 해왔다. 1976년 K2 공군기지에서 부사관으로 근무하면서 맺게 된 인연으로 대구를 제2의 삶의 터전으로 삼게 됐다. 그는 군 생활 중 다니던 야간대학에서 친구 이준동 씨(영화제작자)의 꾐에 넘어가 1984년 대구에서 생애 첫 연극 무대에 올랐다.
그는 그날 관객이 보내준 환호를 잊지 못했고, 평생의 업을 가지게 해준 대구에 인생의 '베이스캠프'를 꾸리기로 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대구 경기, 2011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등 세계적 스포츠 행사의 식전 행사 총감독으로 대구를 대표했고, 왕성한 연극 연출가로서의 활동도 하고 있다.
"대구 사람들이 타지인을 배척한다고요? 아니죠. 오히려 더 많은 기회를 줍니다."
◆김홍기(59) 한국섬유마케팅센터 본부장
"팔공산, 앞산이 둘러쳐진 대구, 삶의 여유까지 주죠."
서울 출신인 김홍기 본부장은 2005년까지 서울에서 살았다. 미국과 중남미, 중국 등 외국에서 생활한 시간도 10년이나 된다. 하지만 그에게 대구만큼 삶을 윤택게 하는 곳은 없었다. 그는 주말이면 산에 오른다. 도심에 오를 수 있는 멋진 산이 있다는 건 이 도시가 가진 매력. 자동차가 없어도 전혀 불편함이 없다. 오히려 산에 오를 땐 자동차보다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훨씬 편하다. 한 주간 업무로 쌓인 스트레스는 팔공산 자락에 올라 맑은 공기를 마시면 훌훌 날아가 버린다. 앞산에 올라서는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지를 되짚어보고 잠시 시름을 내려놓는다.
이런 여유가 준 에너지는 남을 돕는 데 쓴다. 넘쳐나는 차들로 가득 차 대중교통마저 거북이가 된 서울에서는 맛보지 못한 즐거움이다.
◆이영진(45) 코넬비뇨기과 원장
"대구 사람들은 한 번 내 사람이다 싶으면 평생을 함께해요."
이영진 원장은 장사를 했던 부모님을 따라 서울, 대전, 통영 등 전국 10여 개 도시에서 살았다. 어떤 도시든 언제 다시 떠날지 모르는 뜨내기여서 정을 붙이지 못했다.
부산대 의과대학을 나온 이 원장은 개업할 곳을 물색하다 대구를 선택했다. 처가가 대구에 있다는 게 대구에 발붙이게 한 큰 이유였지만, 내심 대구 사람들의 끈끈함을 알고 있어서였다. 그렇게 2003년 5월, 대구에 개원한 이 원장은 자신의 판단이 그르지 않았다는 것을 지금껏 살며 확신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이 원장에게 진료를 받다 서울로 이사를 간 환자가 2년 만에 일부러 이 원장에게서 진료를 받으려고 대구까지 왔다. 한번 맺은 인연을 평생 이어가고픈 대구 사람의 의리였다. 대구 사람의 장점은 역시 깊은 정. 이 원장은 환자들도 한번 '이 사람이 내 주치의다'는 생각을 하면 변함없는 신뢰를 보낸다고 했다.
홍준표 기자 agape1107@msnet.co.kr
홍준헌 기자 newsforyou@msnet.co.kr
허현정 기자 hhj224@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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