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인터뷰 通] '영원한 히피' 가수 한대수

인생의 의미는 길 위에…공연하고, 책 쓰고, 음악 만들고, 늘 바빠요

'문화충격'은 낯선 환경을 접했을 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가수 한대수(66) 씨를 만난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두 문화적 충격을 경험했을 것이다. 1968년, 한 씨의 등장만으로도 세상에 문화적 충격을 안겨줬다. 다듬어지지 않은 외모와 목소리, 반주가 시작되기도 전에 '물 좀 주소'라고 내지르는 그의 음악은 충격 그 자체였다. 2014년 12월 27일, 홀로그램 라이브 콘서트 오픈 행사를 위해 대구를 찾은 한 씨를 만났다. 일반적인 공연을 거부한 그는 이번에도 역시 개척자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한 씨는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새로운 도전에 거리낌이 없었다. 한 씨의 현실은 알코올 의존증 아내의 병간호와 어린 딸 육아로 고달프다. 그러나 '자유와 평화'를 부르짖는 '영원한 히피'의 모습에는 변함이 없었다.

◆새로운 도전은 산다는 의미

남들이 하는 일을 따라하는 것은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 이번에도 그는 일반적인 공연을 거부했다. 이달 17일부터 6월까지 떼아뜨르 분도에서 열리는 '작은평화' 콘서트는 홀로그램 기술을 활용한 콘서트다. 무대 위에는 실제 한대수가 아닌 3D 입체 영상의 한대수가 등장한다. 콘서트는 영상 속 한대수가 노래를 부르거나 진행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홀로그램은 제가 30년 전부터 관심을 가졌던 분야예요. 뉴욕 소호에서 처음 접했는데 기회를 엿보다 마침 제안이 들어와 흔쾌히 응하게 됐어요."

그의 개척자적인 모습은 데뷔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열 살 때부터 시작된 뉴욕 생활을 접고 1968년 한국에 들어왔을 당시는 내로라하는 국내 가수들이 외국 번안곡을 부를 때였다. 스무 살 한대수는 최초로 자작곡을 선보이며 한국 최초의 싱어송라이터로 등극했다. 그러나 정작 그가 한국 최초의 싱어송라이터라는 사실이 각인된 건 시간이 한참 뒤였다. 그는 "외모 때문에 음악이 묻혔었다"며 크게 웃었다. "머리는 길게 하고 청바지 입고 노래를 부르니까 '여자냐, 남자냐'부터 시작해서 '뭐 저런 거지가 있냐'며 입에 오르내렸어요. 내 음악이 들릴 리가 없었지. 20년쯤 지난 뒤엔가 '한대수가 한국 최초의 싱어송라이터'라는 게 주목받았어요."

개척자의 삶이 평탄한 것은 아니었다. 군대 제대 후 1974년 첫 앨범 '멀고 먼 길'을 발표하고 이듬해 2집 '고무신'을 발표했을 때였다. 그는 1, 2집 앨범을 모두 압수당하고 말았다. 유신시대였던 당시, 그의 음악이 '체제 전복적 음악'이란 이유였다. "'물 좀 주소'가 물고문을 풍자했다는 이유였어요. 그게 참 슬픈 일이지. 나는 그 시절이 아니었다면 우리나라 대중음악이 지금보다 훨씬 발전했을 거라 봐요."

그는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끝없이 새로움을 추구한다. "지금도 엄청 바빠요. 2월에는 '한대수 글'(가제)이라는 책이 나오고요, 4월에는 이틀 동안 LG아트센터에서 공연이 있어요. 참, '유공자'라는 영화에도 잠깐 등장했네. 세 마디 찍으려고 12시간 기다렸던 기억이 나네요." 음악 작업도 한창이다. 1월 중에는 1집 발매 40주년을 기념하는 앨범이 나온다.

계속해서 새로운 길로 들어설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그는 그 길 위에 인생의 의미가 있다고 믿었다. "모두가 매일 쳇바퀴 도는 생활을 한다면 인류가 어떻게 발전하겠어. 비난받고 욕먹어도 나 같은 사람이 있어야 인류가 발전하지."

◆고독 속에서 자유와 평화를 외친다

공연 도중, 영상 속 그는 1960년대 히피 문화에 대해 말했다. "'히피' 하면 마약을 하고, 술이나 마시고, 씻지 않아 더러운 사람을 떠올리기 쉬운데 히피들은 반체제 자연찬미파 사람들을 말해요. 전쟁을 반대하고 예술과 사람을 찬양해요. 궁극적으로는 평화로운 세계를 지향하죠."

'행복의 나라로' 등과 같은 노래에 배어 있듯 그는 데뷔 시절부터 자유와 평화를 강조했다. 그를 '영원한 히피' '한국 최초의 히피' 등으로 부르는 이유다. 그는 "아직 세상이 평화와 거리가 멀다"고 말했다. "세상에 평화라는 말이 너무 없어요. 기독교 대 이슬람교 간 갈등만 봐도 더 심해지고 있잖아요. 평화를 부르는 젊은이들의 목소리도 없고. 이대로라면 제2의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싶어요."

'평화'에 무관심한 요즘 젊은이들도 한 씨의 걱정거리다. "내가 젊은 시절엔 돈이 없어서 헤맸다면 지금은 돈은 있지만 정서적으로 채워지지 않아 헤매는 것 같아요. 딸을 키워보니까 모든 게 우리나라 교육 때문이라는 걸 알았어요. 돈, 명예, 성공에만 집착하게 만들어서 자유로운 사고는 허용하질 않는 거예요."

이번 콘서트 이름에서도 '평화'는 빠지지 않았다. "'작은 평화'는 12년 전 내가 냈던 사진집 이름이에요. 평화는 작은 데서 시작돼야 한다는 생각이었어요. '평화통일' '세계 평화'를 부르짖기 전에 우리 친구, 가족, 마을 단위의 평화를 먼저 실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굴곡? 난 항상 밑바닥에 있었지"

한 씨의 인생은 영화나 소설과 비교되기도 한다. 그가 가상 이야기만큼이나 굴곡진 인생을 살았기 때문이다. 부산의 한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그는 "평생이 고독했다"고 말한다. 청소년기 아버지의 이유 모를 실종을 겪었고, 첫 아내와의 결별 후 22살 연하의 러시아인과 재혼했지만 그녀는 현재 알코올 의존증 환자다. 한 씨는 아내의 병간호를 하며 59세에 얻은 늦둥이 딸 양호(7)를 키우고 있다. 이 모든 상황에 그는 자유로운 영혼의 신분을 뒤로하고 현실에 발을 붙이고 살아야 하는 '생활인 한대수'가 되어야만 했다. "그동안 자유롭게 살던 나한테 저 위에 있는 분이 벌을 주는 것 같아요. '너 그동안 자유로웠으니까 이제 구속당해 봐라' 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내가 그리던 삶은 지금쯤 태국 바닷가에 오막살이 하며 '양호한 여인'과 사는 건데 말이야. 하하하."

그의 부인 옥사나 알페로바(43) 씨는 여전히 알코올 의존증과 싸우고 있다. "전에는 한 번 마시면 2, 3주에 걸쳐 소주 33병 가까이를 마셨는데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2, 3일 하면 끝나요. 근데 아직 많이 힘들죠. 병원에서 치료도 계속 받고 있고요."

반면 양호 양은 양호하게 자라고 있다. 양호 양은 올해 초등학교 2학년이 된다. 한 씨는 "양호는 내년부터는 어린이 모델로 활동하려고 준비 중"이라고 했다. "신에게 벌을 받는 것 같다가도 아이를 보면 또 애가 정말 예뻐. 아이와 지내다 보면 내가 그동안 세상의 반쪽만 알고 살았구나 싶어요."

한 씨는 자신의 인생을 '굴곡졌다'고 수식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굴곡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는 건데 나는 올라가 본 적이 없잖아." 다시 진지한 모습으로 돌아와 말을 이어갔다. "내 경우는 좀 심했지만 모든 인생에는 굴곡이 있어요. 그런데 굴곡의 내리막길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언젠가는 올라간다고 희망을 가져야 하는데 자꾸 한강으로만 가는 게 안타까워요."

한 씨는 인터뷰 내내 '하하하' 하며 큰 소리로 웃었다. 웃음의 의미를 묻는 기자에게 말했다. "살아보니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웃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단 말이지.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헛되도다, 헛되도다' 하면서 그냥 '허허허' 하고 웃는 거예요."

한대수 홀로그램 라이브 콘서트는 떼아뜨르 분도 극장에서 17일부터 매달 첫째, 셋째 토요일 오후 8시에 열린다. 김의정 기자 ejkim90@msnet.co.kr

사진 우태욱 기자 woo@msnet.co.kr

※ 한대수는…

한대수는 1948년 핵물리학자였던 아버지 한창석 씨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박정자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7살 무렵 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아버지가 돌연 실종됐고 어머니는 재가하자 그는 신학자인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그가 17살 때 아버지가 발견돼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아버지의 실종 이유는 알아내지 못한다. 그는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할아버지의 권유로 미국 뉴햄프셔 대학교 수의학과에 입학했지만 곧 자퇴를 하고 뉴욕 사진학교에 입학한다. 1968년에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송창식'윤형주'조영남과 함께 '세시봉'으로 데뷔한다. 그는 한국 대중음악 사상 처음으로 자작곡을 부른 최초의 싱어송라이터다. 그의 곡 '행복의 나라' '바람과 나' '물 좀 주소' 등은 한국을 대표하는 포크 명곡이 되었다. 현재 그는 사진, 앨범, 공연 등을 통해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김의정 기자 ejkim90@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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