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광장] 을미년

경북대 고고인류학과·경북대학교 대학원 영문학 석사·대학강사
경북대 고고인류학과·경북대학교 대학원 영문학 석사·대학강사

UN군 군의관으로 반년 간 레바논에 파병을 다녀온 친구가 있다. 그곳에서 세계 각국의 군의관들과 어울리며 많은 대화를 나눈 친구는 국제사회에서 부쩍 달라진 한국의 위상에 깜짝 놀랐다고 한다. "심지어 한국에서 태어나지 못한 것이 한이다, 한국에 가서 살고 싶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녀석들도 있더라고." 잔뜩 고무되어 떠들던 친구, 잠시 후 묻지도 않았는데 덧붙이길 "제3세계의 의사들이 아니고, 덴마크, 프랑스, 스페인 국적의 의사들이 그러더란 말이야. 우리나라 생각보다 대단해."

내가 비정규직과 저소득 자영업자의 문제, 1천조에 육박하는 가계부채, 높은 자살률과 낮은 출산율 등을 거론하자 친구 왈 "유럽 국가들도 규모에 차이가 있을 뿐, 그런 문제는 다 가지고 있다더군. 유럽 친구들 주장의 핵심은 이거야. 한국에는 자신들의 조국에는 없는 한 가지가 있다고 하더라고. 그 한 가지 때문에 우리가 부럽다는 거야." 친구는 약간 뜸을 들이다가 "유럽 애들 말이, 한국에는…미래가 있다는 거야. 미래가."이렇게 말했다.

언젠가 골드만삭스가 2050년경에 한국이 세계에서 1인당 국민 소득이 두 번째로 높은 나라가 될 것이라는 리포트를 발표한 기억이 나기도 한다. 며칠 전에는 영국의 한 연구소에서 한국이 2030년 세계 8위의 경제 대국이 될 것으로 전망하기도 했단다. 도대체가 저런 전망이 믿기지가 않는다. 주위를 둘러보면 다들 살기가 사상 최악으로 어렵다고들 아우성인데, 참말로 저 전망이 들어맞는다고 하더라도, 2030년이나 2050년이나 앞으로 먼 미래의 일이니 당장 우리는 올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부터 걱정하는 것이 급선무일 듯하다.

을미년이 결국 밝았다. 다들 결심하신 대로 담배들 끊으셔서 담뱃세 인상이 결국 국민 건강 증진이 아닌 서민 증세로 귀결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새해에는 배도 침몰하지 말고, 비행기도 추락하지 말며, 설사 사고가 나더라도 전원이 구조되었다는 뉴스가 오보가 아니길 바란다. 올해는 북한의 도발도, 아군끼리의 왕따나 폭력도 없어서, 우리 장병들이 단 한 사람도 죽지 않고 말짱하게 부모들 곁으로 돌아오길 빈다. 무시를 당해 분신하는 경비원도, 허무하게 목숨을 잃는 뮤지션도, 죄송하다는 편지를 남기고 자살하는 모녀도 없었으면 한다. 무급 휴직자들의 자살 러시가 멈추고, 철탑 위로 올라간 노동자들의 원직복귀가 이루어졌으면 한다. 구조조정이 예정된 근로자들이 그 칼날을 피해 가기를 바라며, 이미 구조조정이 된 사람들이 힘들게 시작한 자영업이 최소한 빚더미가 되지 않길 빈다.

간절히 소망하건대 노후 원전들에서 사고가 나지 않기를 바라고, 거대한 싱크홀로 인한 빌딩의 붕괴도 그저 괴담 수준에 지나지 않는 기우이기를 기원한다. 공무원연금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되길 빌며, 젊은 나이에 직장에서 밀려나 처자식 먹여 살리기 위해 시험판으로 흘러간 중고 고시생들의 합격 소식도 꼭 들려왔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임대 세대의 아이들을 아파트 놀이터에서 쫓아내지 않는 최소한의 윤리가 2015년에는 꼭 지켜졌으면 한다.

당장 모두 내일을 걱정하는 불안한 사회에서 프랑스 의사, 스페인 의사들이 부러워한다는 대한민국의 '미래'는 아무리 봐도 사치스러운 희망이다. 미국의 투기자본이 예언한 30년 뒤의 부국 따위는 바라지도 않으니, 누군가의 불행이 언젠가 나의 차례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없는, 상식적인 사회에서 살고 싶다. 먼 미래의 부귀영화보다도, 바로 지금 시민의 삶과 안전이 더 소중하다는 합의가 이루어지는 나라에서 우선 2015년, 딱 1년을 먼저 살고 싶다.

박지형/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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