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화기는 화재 현장의 첫 소방관이다. '골든타임'(5분) 안에 불길을 잡아야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데 이때 가장 필요한 것이 소화기다. 화재 초기 때 소화기 1개는 소방차 1대보다 더 큰 역할을 한다. 하지만 아직도 소화기가 없는 곳이 많다. 소화기가 있더라도 사용연한이 지났거나 사용법을 몰라 소화기가 무용지물이 되기 일쑤다. 소화기를 제대로 설치하고 사용법을 누구나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소화기 없는 곳 많아
지난해 11월 18일 오후 10시 47분쯤 대구 중구 봉산동 박모(30) 씨가 운영하는 휴대폰 판매점 천장에서 불이 났다. 이 화재는 행인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대원에 의해 40분 만에 꺼졌다. 하지만 건물 천장과 내벽이 불에 타 1천550만원 상당의 재산피해가 발생했다.
화재 당시 이 건물에는 소화기가 하나도 없었다. 소방법상 근린생활시설은 바닥 면적 100㎡당(미만도 포함) 소화기를 반드시 1개 이상 둬야 한다. 소방 관련 법에는 내부 공간이 벽으로 나뉜 건물은 칸(방)마다 소화기를 둘 것을 권장하고 있다. 이에 따라 내부가 매장과 창고 등 두 칸으로 나뉜 43㎡의 이 건물에는 소화기가 최소 1개, 많으면 격실마다 하나씩 모두 2개가 있어야 한다. 전문가들은 "규정을 어기고 소화기를 두지 않은 상태에서 직원이 있었어도 불을 막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이에 앞서 같은 달 14일 오후 3시 25분쯤 남구 대명동 4층 건물(연면적 620㎡)의 꼭대기층 주택(134㎡)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때마침 길을 가던 김모(34) 씨가 연기를 보고 119로 신고를 했다. 5㎞ 거리에 떨어져 있는 119안전센터의 선착대가 오는 데 7분이나 걸렸다. 그동안 불이 거세져 결국 주택의 절반(60㎡)을 태웠고, 나머지도 연기와 열에 심하게 훼손됐다. 다행히 외출했던 집주인(76)은 큰 화를 면했지만 2천800만원의 재산피해를 당했다. 이 집 또한 화재에 대비한 소화기가 전혀 없었다. 같은 건물 1층에 불을 다루는 구이 음식점에도 소화가 없었다.
소화기가 있어도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같은 해 11월 16일 오후 11시 9분쯤 남구 두류공원로의 한 지하 유흥주점 주방에서 불이 났다. 소방차가 신고 4분 만에 도착했지만 6㎡의 주방이 불에 탔고, 나머지 87㎡가 연기에 뒤덮였다. 이 불로 332만원의 재산피해가 났고 같은 건물 1~3층의 여관 투숙객 10여 명이 급하게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당시 음식을 조리하기 위해 튀김기름을 가열하던 중 불길이 일어났고, 이를 본 주점 업주(29)가 물을 뿌리는 순간 화재가 커졌다. 업주는 비치된 소화기를 쓸 생각은 하지 못하고 기름에 붙은 불에 물을 사용하면서 피해를 키운 것이다.
◆소화설비 관리 엉망
지난해 말 본지 기자는 소방담당자와 함께 현장 소방점검에 동행했다. 대구시와 중부소방서는 이날 오후 2시 중구 동성로 노래연습장 3곳을 대상으로 소방합동점검을 벌였다. 노래연습장은 다중이용시설로 민간 소방시설전문업체에 소방점검을 1년에 2차례씩 받은 뒤 시설을 개선해야 한다. 하지만 이날 점검한 3곳 중 2곳은 소화설비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노래연습장 2곳은 '소화기 압력 부족 및 안전핀 이탈'과 '소화기 설치 장소 부적' '소화전 앞 적치물 방치' 등을 지적받았다. 이 밖에 ▷누전 차단기 위치 및 전선 규격 부적합 ▷휴대용비상조명등 배터리 이탈 ▷노래반주기 접지 불량 ▷비상구 유도등 배터리 부족 ▷환풍기 노후로 동작 불량 등이 지적됐다.
점검 과정에서도 문제가 드러났다. 사전에 소방서가 점검 대상 업주에게 점검 일정을 통보하다 보니 일부 업주는 점검일에 맞춰 소화기를 사들여 오다 소방담당자와 맞닥뜨리기도 했다. 또 모든 객실에 손님이 있어 각 방의 점검 실태를 모두 파악할 수 없었고, 대피 위험성 여부와 관계없이 해당 업소가 소방법에 따른 최소 규정을 지키는지만 확인하는 데 그쳤다.
앞서 이날 기자는 동부시외버스터미널 1층 대합실을 찾았다. 비치된 7개의 소화기 중 권장 사용연한(8년)을 넘은 것이 5개나 됐다. 2000년(3개)과 2003년(1개)에 만들어진 소화기가 버젓이 놓여 있었고 심지어 1992년에 제작된 것도 있었다. '소화기'라는 문구가 표시된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소화기는 간판 뒤에 놓여 눈에 잘 띄지 않거나 군데군데 녹이 슬고 거미줄이 있는 등 낡은 상태였다.
이광성 대구소방안전본부 예방안전과 시설지도담당은 "나무나 종이, 플라스틱, 식용유 등 다양한 곳에 불이 붙을 수 있는데 섣불리 물을 뿌렸다간 불을 더 키울 수 있다. 이럴 때 소화기만 있으면 웬만한 화재는 바로 진화할 수 있다"며 "화재 초기에 소화기가 발휘하는 효과는 소방차보다 더 크지만 전반적으로 소화기를 제대로 갖추는 데 소홀한 편이다"고 했다.
대구시는 올해 재난법이 개정되면서 이 같은 문제가 점차 개선될 것이라 설명했다. 이경배 대구시 안전총괄과장은 "올해부터는 안전관리를 소홀히 하는 건물주가 처벌 대상이 되므로 업주들의 안전불감증이 차츰 사라질 것으로 본다"고 했다.
◆소방당국, 소화기 확보 사업 나서
소방당국은 시민 스스로 화재 초기에 대응할 수 있도록 노후 소화기 폐기와 소화기 확보 사업을 벌이고 있다.
대구소방안전본부는 2013년 9월부터 올해 12월까지 자율적으로 소화기를 교체'폐기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각 시설의 소방안전관리자가 점검 이후 자체 폐기하도록 하거나 소방서마다 '소화기 수거'정비 지원센터'를 운영하면서 시설을 방문하고 안내서한문을 발송하는 등 노후 소화기 폐기를 추진하고 있다.
또 '1가구 1차량 1소화기 갖기' 캠페인과 저소득층 소화기 기증 등 소화기 보급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소방본부는 2013년부터 지난해 10월까지 1만3천384가구에 소화기와 경보형화재감지기를 무상으로 전달했다. 이는 2017년까지 목표로 한 3만6천157가구의 37%에 해당한다. 이와 함께 손쉽게 소화기를 구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주유소와 편의점, 대형마트 등을 대상으로 소화기 판매소 확대도 추진하고 있다.
소방본부는 소화기 사용법 등 안전교육도 벌이고 있다. 지난해 소방안전교육을 받은 사람은 22만6천166명이다. 이 가운데 유치원생과 초등학생이 절반이 넘는 12만5천90명이었다. 지난해 10월까지 19만9천171명이 교육을 거쳤다.
공하성 경일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여성과 장애인이 힘들이지 않고 쉽게 쓸 수 있는 스프레이식 간이 소화기도 있는 만큼 이를 일반식 소화기와 함께 구비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서광호 기자 kozmo@msnet.co.kr
홍준헌 기자 newsforyou@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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