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민송기의 우리말 이야기]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와 동북공정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가 인기를 끌면서 영화 제목으로 사용된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에 대한 관심도 많아진 편이다. '공무도하가'는 현재 남아 있는 우리 노래 중 가장 오래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 역사의 오래됨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이다. 그렇지만 '공무도하가'의 "님아 그 물을 건너지 마오./ 끝내 그 물을 건너셨구려./ 강물에 휩쓸려 돌아가시니,/ 우리 님 어이할꼬"라는 가사는 "公無渡河 公竟渡河 墮河而死 將奈公何"를 번역한 것일 뿐이다. 그리고 처음 채록된 한나라 때의 《금조(琴操)》나 배경설화가 기록되어 있는 진나라 때의 《고금주(古今注)》,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가사가 확정되어 수록된 송나라 때의 《악부시집(樂府詩集)》, 명나라 때의 《고시기(古詩紀)》와 같은 책들이 모두 중국의 문헌이다. 역사학계와 국문학계에서는 이 작품의 국적에 대한 논쟁이 있었는데, 중국의 동북공정과 맞물리면서 더욱 민감한 문제가 되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공무도하가'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은 짧은 편이다. 현재 우리는 고대의 노래로 '공무도하가'와 더불어 《삼국사기》에 나오는 유리왕의 '황조가', 《삼국유사》 가락국 건국신화에 나오는 '해가'가 있다고 배우고 있다. 우리 역사서에 나와 있지 않은 '공무도하가'가 우리의 역사, 우리의 노래로 인정받는 데 가장 큰 노력을 한 사람은 《해동역사(海東繹史)》를 지은 조선 후기 실학자인 한치윤이다.(한치윤은 기자(箕子)가 쓴 '맥수가'(麥秀歌)도 고조선의 노래로 기록하고 있다.)

《해동역사》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공후인(引) : 공후인은 조선진의 진졸(津卒) 곽리자고의 처 여옥이 지은 것이다. 곽리자고가 새벽에 일어나서 배를 저어서 빨래를 하고 있는데, 어떤 백수광부(白首狂夫)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술병을 든 채 물결을 헤치면서 강을 건너갔다. 그러자 그의 아내가 뒤따라가서는 건너지 말라고 하였으나, 막지 못하여 마침내 백수광부가 강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이에 그의 아내가 공후를 가져다가 타면서 공무도하가를 불렀다. 그 소리가 몹시 처량하였는데, 노래를 마치고는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곽리자고가 집으로 돌아와서는 그 소리를 아내인 여옥에게 말해 주자, 여옥이 상심해 하면서 이어 공후를 가져다가 그 소리를 그대로 불렀는데, 듣는 자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흐느껴 울었다. 여옥이 그 소리를 인근에 사는 여용에게 전하였으며, 곡의 이름을 공후인이라 하였다. (《고금주》 인용) 살펴보건대, 조선은 바로 한나라 때 낙랑군의 조선현이다. 여옥이 지은 공후인은 《고시기》에 그 가사가 실려 있는데, 역시 '공무도하'라고 하였다. 또 《금조》 9인(引)에 공후인이 있는데, 모두 여옥에게서 나온 것이다.

'공무도하가' 가사는 백수광부의 처가 부른 것을 곽리자고가 여옥에게 전해주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공후인'이라는 악곡은 여옥이 '그 소리를 그대로 불렀다'는 대목 때문에 백수광부의 처가 노래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처음과 마지막에서 여옥이 지은 것이라고 확정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악곡은 여옥의 창작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결국 '공무도하가'가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은 '공후인'이라는 악곡의 형태인데, 그 악곡의 작사자는 백수광부의 처이고, 작곡자는 여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남편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죽음을 바라보는 슬픔이 사람들을 감동시키면서 중국에까지 퍼져 나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공무도하가'의 소유권(?)을 중국이 사료를 근거로 강력하게 주장하면 우리는 밀릴 수도 있다. 그렇지만 '공무도하가'를 조선 사람이 지었다는 것은 분명한 데다, 우리가 더 많이 알고, 사랑하고, 즐긴다면 누가 그것을 우리나라의 노래가 아니라고 시비를 걸 수 있겠는가?

능인고 교사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