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최세정의 대구, 여성을 이야기하다] 영남 첫 소프라노 추애경

1927년 미국 유학 떠난 천재, 송별음악회 열리자 인파 북적

대구의 절반은 여성이다. 그렇지만 역사에 기록되고 지금까지 기억되는 인물 가운데 여성은 아주 소수에 불과하다. 대구 근대기에는 각 분야에서 왕성한 활동을 했던 여성들이 많다. 이제 그들을 불러내어 그들의 삶이 가지는 오늘날의 의미를 읽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다. 대구여성가족재단이 2014년 한 해 동안 세미나를 통해 발굴해 낸 대구 여성의 이야기를 풀어본다.

1927년 6월 3일, 대구제일소학교 강당에는 한 음악가의 송별음악회가 열렸다. 좋지 않은 날씨에도 수백 명의 관객이 강당을 가득 메우고 열띤 환호를 보냈다. 박태준은 주복남의 피아노 반주로 '잘 가시오'를 불렀고, 김애국, 차원석, 견신희가 출연해 연주회를 가졌다. 매일신보 1927일 6월 5일 자에 보도된 이 송별음악회는 영남지역 최초의 소프라노, 추애경의 고별 음악회다. 미국 워싱턴대학교로 음악 유학을 떠나는 추애경을 축복하는 무대였다.

'천재적인 여류 음악가'로 칭송받던 추애경은 서문시장에서 건어물상회를 운영했던 아버지와 어머니 밑에서 2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신명여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이화학당에서 성악을 전공한 추애경은 졸업 후 신명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음악 활동을 주도했다. 일본과 미국에 유학해 피아노와 성악을 전공한, 당시 보기 드문 국제적인 활동을 했던 음악가이다.

1920년대, 일제강점기 시절 빛도, 희망도 없던 시절이다. 하지만 이 여성은 음악의 꿈을 적극적으로 키워갔다. 음악이라는 뚜렷한 꿈을 갖고 외국 유학까지 떠나는 진취적인 여성에 많은 사람이 박수를 보냈다. 송별음악회에 입추의 여지 없이 사람들이 몰렸고, 여기에서 추애경은 '고별가'를 불렀다. 연주곡마다 재청, 삼청의 성황을 이루었던 것은 당시 일제강점기 희망 없던 사람들에게 음악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보여준다.

추애경은 1914년 집안에서 유일하게 교회를 다녔다. 서양문물이 교회를 통해 들어오면서 예술가들이 성장하는데 교회는 중요한 터전이었다. 당시 제일교회에는 추애경의 장래 남편이자 뛰어난 노래 실력을 갖췄던 김태술과 박태원, 박태준, 권영화, 현제명이 다니고 있었고 비슷한 연배의 이들은 함께 교류하며 친분을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 예술사에 큰 획을 그은 이들이 한 교회에 다니며 젊은 시절을 보냈던 이야기는 참 흥미롭다.

제1세대 서양음악가인 추애경은 아쉽게도 미국 유학 이후 한국으로 귀국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1932년 가을 보스턴 음악대회에 참가해 언론의 호평을 받았다. 당시 보스턴 음악잡지에서 추애경을 '리릭소프라노로 조선의 천재'라고 격찬했다.

일제 강점기 식민지 조선에서 신문물인 서양음악을 접한 후 꿈을 좇아 미국으로 떠난 추애경은 비록 세계적인 소프라노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남편 김태술과 함께 영남지역 제1세대 음악가로서 큰 족적을 남겼다. 추애경은 1973년 세상을 떠나 매사추세츠주 블루힐즈공원에 잠들어 있다. 영남지역 최초의 소프라노이자 천재 여류 음악가로 칭송받았던 추애경의 스토리는 손태룡 한국음악문헌학회장에 의해 발굴될 수 있었다.

최세정 대구여성가족재단 책임연구원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