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백신 접종했지만…" 또다시 텅 빈 축사

안동 50대 축산농 '4년전 악몽' 데자뷰

구제역이 경북지역으로 확산할 조짐을 보이자 구제역 방역에 비상이 걸렸다. 5일 오후 영천시 화남면 삼거리 긴급방역초소에서 현장 근무자들이 이동차량에 대해 차량소독을 실시하고 있다. 정운철 기자 woon@msnet.co.kr
구제역이 경북지역으로 확산할 조짐을 보이자 구제역 방역에 비상이 걸렸다. 5일 오후 영천시 화남면 삼거리 긴급방역초소에서 현장 근무자들이 이동차량에 대해 차량소독을 실시하고 있다. 정운철 기자 woon@msnet.co.kr

"4년간 소독도 정말 열심히 하고 백신 접종도 했어요. 그런데 또다시 구제역에 걸리다니…. 이런 걸 두고 속수무책이라고 하나요?"

5일 안동 남후면 고상리. 자식같이 키워온 돼지를 구제역으로 묻어야 했던 농장주 김모(57) 씨는 텅 빈 축사를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이어가지 못했다.

김 씨는 4년 전 악몽 때문에 충격이 더욱 크다고 했다. 돼지가 자리를 비운 썰렁한 축사를 쳐다보면 4년 전 기억이 고스란히 떠오른다는 것이다.

지난 2010년 12월, 온 나라를 강타한 구제역 파동으로 김 씨는 자신의 돼지 8천 마리를 땅에 묻었다. 평생을 생활 밑천으로 삼았던, 자식 같았던 멀쩡한 돼지들을 하루아침에 땅속에 묻어야 했던 기억은 다시는 되풀이하고 싶지 않은 악몽이었다.

지난 4년간 그는 또다시 아픔을 겪지 않기 위해 정말 열심히 했다고 말했다. 넋만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는 것이다. 김 씨는 구제역 태풍이 몰아친 지 1년여 만인 2011년 11월, 재입식을 통해 돼지를 키우기 시작했다. 전처럼 많은 돼지는 아니었지만 한 번 시련을 겪은 덕분에 방역과 예방접종 등 철저한 축사 관리를 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축산업을 꾸려간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러나 결코 자만하지 않았다. 아픈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매년 사육 마릿수를 늘려가며 건실한 농장을 만들어갔다. 몇 년이 흘러 이제 다시 기반을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안동양돈협회 간부로 구제역에 대한 지식이 누구보다 많은 김 씨는 3일 오후 자신의 축사에서 돼지가 평소와 다른 점을 발견했다. 간이 키트 검사를 했고, 4일 최종 확진 판정을 받았다.

억장이 무너졌다. 하지만 그는 다른 축산 농가에 피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구제역 확산 방지에 나서야 한다고 했다. 매 끼니를 도시락으로 때웠다. 몸에 묻은 소독약이 얼어 손가락까지 쩍쩍 달라붙는 등 열악한 상황이다. 김 씨는 "내가 이 상황에서 어떤 말을 하겠느냐. 지금은 무엇보다 남은 돼지를 지키고 다른 곳으로 확산되지 않도록 하는 게 최우선"이라고 했다.

김 씨 농가 인근 축산 농가들은 모두 덜덜 떨고 있다. 4년 전 기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양돈협회 안동시지부 석제희(51) 사무국장은 "지난번 구제역 당시 정부 축산정책에 의해 살처분했으면서도 배상이 아니라 보상으로 처리됐다. 멀쩡한 돼지를 묻은 것도 억울한데 보상금이 마치 불로소득이라도 되는 양 4천만원이 넘는 의료보험료 폭탄을 맞은 축산농가도 있었다. 또다시 아픈 기억이 되살아나고 있으니 축산농가들은 요즘 정말 힘들다"고 했다.

안동의 경우, 지난 2010년 11월 29일 와룡면 서현양돈단지 내 한 돼지축사에서 구제역이 발생, 한우 3만4천418마리, 돼지 10만2천738마리 등 모두 14만6천19마리가 살처분됐다. 한우의 65%, 돼지의 87%가량이 사라졌다.

당시 전국으로 휘몰아쳤던 구제역의 진원지로 안동이 꼽히면서 '진원지 불명예' 논란으로 축산농들은 치명타를 맞았다. "안동 고기는 먹으면 안 된다"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번지면서 지역 경제 전체가 치명타를 맞았다. 구제역 여파로 안동지역 한우골목과 식당가들은 6개월여 동안 사실상 개점휴업에 들어가는 등 축산산업 기반과 함께 지역 경제가 바닥으로 떨어진 것이다.

안동에서 발생, 전국으로 퍼진 구제역 바이러스는 지역 축산농들에 의해 해외에서 유입된 바이러스가 아니라는 사실이 서울대 연구진들에 의해 밝혀지기도 했지만 이미 엄청난 피해를 입은 뒤였다.

기업들마다 'Again Andong'(어게인 안동)이라는 구호를 통해 소고기 소비촉진 운동 등을 하며 구제역 극복에 나선 지 4년. 지난해 11월 말 매몰지인 '가축무덤' 516곳의 생태를 완전 복구해 자연상태로 되돌려 청정 축산지역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완전 청정상태로 돌아가자마자 다시 구제역 불똥이 덮쳤다.

지역의 한 축산농은 "4년 전 축산기반이 완전 붕괴된 이후 2년여에 걸쳐 농장을 재건하고 축산업을 다시 살리기 위해 악몽 같은 시간을 보냈었다. 정부는 농가에 더 이상 피멍이 들지 않도록 제대로 된 대책을 내달라"고 하소연했다.

안동 전종훈 기자 cjh49@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