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연필을 깎으며

얼마 전 함께하는 독서모임에서 새 연필을 선물로 받았다. 평상시 연필을 좋아하는 내 취향을 배려한 것 같았다. 오랜만에 연필을 받고 보니 그동안 주저앉은 마음으로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설렘이 들어와 마음이 조금 바빠지는 듯했다. 그러나 어떤 것이든 새것 앞에서 둘러가는 버릇이 있어 선뜻 쓰기가 망설여져 며칠을 만져보기만 했다. 가령 묵은 다이어리에 집착하거나, 해 바뀐 달력을 얼른 교체하지 못하는 것도 얼마간의 낯섦과 알 수 없는 두려움 같은 것이 있어서일까. 어쩌면 연필을 깎는 순간 '새'것 속으로 들어가, 있지도 않은 날개라도 달아야 할 것 같은 그 불편함을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맘때면 내놓아야 할 단단한 각오 같은 것이 없어, 굳이 어떤 의리로 관계를 유지하려고 묶은 것을 고집하는지도 모른다. 그런다고 해서 지금까지 오지 않은 것들이 와 주는 것도 아님을 안다. 그러나 바람 든 순무 같기도 하고, 헛발을 디디는 것 같은 이 느낌을 어찌할 수 없기에 시간은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이미 우리를 새해 속에 세워놓는 것일까.

한 겹 한 겹 어둠을 벗기듯, 묵은 마음을 걷어내듯 연필을 깎았다. 가느다란 심이 드러났다. 언젠가 바닷가에서 일출을 기다릴 때처럼, 기다리던 사람이 문을 밀고 들어서기라도 한 것처럼, 귀한 것을 잃어버릴까 애쓰는 사이 사각사각 떨림이 다가왔다. 이 출렁임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직 한 번도 얼굴 내밀지 않은 언어를 불러보고 싶기도 하고, 어쩌면 긁적거리다 만 시를 더 망칠 수도 있겠다. 그런가 하면 읽다 만 어느 철학자의 사생활에 진한 밑줄을 긋기도 하고, 또한 그럴 수만 있다면 누군가에게 보내는 고백의 형식을 이 연필로 옮겨보고 싶기도 하다. 이렇듯 한 자루의 연필 속에 여린 손가락 같은 떨림이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을 살짝 가려주는 것 같아 마음 한편이 물렁해졌다.

시시하게 연필이나 깎으며 새날을 맞이하는 동안, 당신은 멀리서 해맞이를 하고 붉은 얼굴로 돌아오고, 당신은 입김을 뱉으며 정상을 다녀왔다고 한다. 바다도 산도 아닌 마당에 서서 고요한 달의 움직임을 바라본다.

새의 부리처럼 하루만큼의 어둠을 쪼아 근근이 제 몸을 밝히는 달이 오늘은 온전한 영혼을 얻은 듯하다. 그러나 저 온전함도 온전할 수만 없음을 알기에 곧 어둠 속으로 한쪽 입술을 묻을 것이다. 우리 또한 아득한 어둠을 지느러미로 밀며 경계도 없이 새날을 열어 갈 것이다.

때때로 막막함에 부딪혀 돌아오기도 하겠지만, 절개지 앞에서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럴 때마다 사각사각 새것의 떨림에 귀 기울이며, 낯선 새해를 조심스레 깎아가야 할 것이다. 마음을 깎듯 연필을 다듬으며, 하루하루가 부디 오래 낯설기를 바라본다.

이향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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