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병구의 서울생활, 어떻습니까?] 전옥상 대화강건(주) 회장

"성실 하나로 건설 도급순위 385위에서 10위로 뛰어올랐죠"

전옥상 회장이 지난해 입주한 서울 용산구
전옥상 회장이 지난해 입주한 서울 용산구 '재경 대구경북시도민회' 사무실 앞에서 대구경북 학숙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중학교 졸업 뒤 무작정 상경, 성실함 하나로 건설 도급순위 385위에서 10위권을 뛰어넘는 성공을 일궈낸 전옥상(66) 대화강건㈜ 회장.

한국전쟁 이태 전 구미시 도개면 낙동강 일선교 건너 자그마한 신림리 마을에서 태어난 전 회장은 빈농의 6남 1녀 중 다섯째로, '밥 한 끼' 마음껏 먹기 어려워 늘 배가 고팠다.

아버지는 나락을 수매해 정미소에서 쌀을 찧은 뒤 판매하는 도매 '곡물상인'(곡상) 밑에서 일했다. 여러 동네에서 나락을 사들인 곡상 밑에서 아버지는 신림리 나락 수매로 약간의 수수료를 받아 생계를 이었다. 몇 마지기 되지 않는 논은 가족들 양식으로도 빠듯했다. 전 회장이 초등학교에 갓 들어갔을 무렵 육군중앙경리단에 근무했던 큰형(80)이 몇 푼 되지 않는 군대 월급을 모아 동생들 학비에 보태라고 보내줄 만큼 집안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도개에서 초'중학교를 졸업한 전 회장은 '밥'을 제대로 먹기 위해 무작정 상경할 수밖에 없었다.

◆실패와 방황 딛고 일어서다

"시골서 밥을 못 먹으니, '이건 안 되겠다' 싶어 서울로 왔어. 낮엔 일하고 밤엔 학원에 다녔지. 학교는 못 가더라도 학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래야 장사라도 할 거 아냐."

먼 친척이 운영하는 조명회사에 들어간 것이 전 회장의 처음이자 마지막 직장이었다. 제조공장은 원효로 쪽, 점포는 청계천 세운상가 자리에 있었다. 처음엔 제조공장에 들어가 1년가량 일했는데, '이렇게 해서 언제 기술을 배우겠나'는 생각이 들어 영업을 배울 요량으로 사장에게 졸라 점포로 들어갔다. 부지런히 하다 보니 2년 만에 청계천 상인들 대다수를 알게 되고 영업에 문리가 트였다. 당시 월급은 1천500원, 3년 지나서 2천원으로 올랐다. 이때쯤 한양공고 야간 전기과에 들어가 낮엔 일하고, 밤엔 공부했다.

전 회장은 "영업을 익힌 뒤에는 다시 제조기술을 배워야 되겠다 싶어 공장으로 보내달라고 했는데, 이번엔 안 된다는 거야"라고 했다.

결국 4년 만에 따로 독립해 자그마한 조명업체를 직접 차렸다. 기존 공장 한쪽에 임대료 주고 기계 몇 대 빌려 놓은 게 전 회장의 첫 공장, 대일공업사였다. 워낙 열심히 하고, 영업할 당시 거래처 사장들이 인정해준 터라 장사는 순조롭게 됐다. 8년 만에 서울은 물론 전남, 광주까지 거래선을 뚫을 정도로 업체는 성장했다. 자신의 진짜(?) 번듯한 공장을 짓기 위해 경기도 화성에 땅도 사놓았고, 결혼해 구로구에 집도 마련했다. 하지만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은 전 회장의 조명사업이 망하는 계기가 됐다.

"2, 3일에 1차례씩 8t 트럭 1대 분량으로 광주에 물건을 보냈는데, 광주사태 18일 동안 물건 납품이 완전 중단된 거야. 별수 있어? 끊어준 어음이 모두 돌아왔고, 철판 등 재료값으로 준 어음을 막다 보니 부도나 버렸지."

화성의 공장 터도 날리고, 은행에 담보 잡혔던 유일한 '내 집'도 넘어갔다.

1980년 초 전 회장은 무일푼으로 무작정 상경했던 15년 전 상황으로 되돌아갔다.

조명설비로 잔뼈가 굵은 전 회장은 그동안 익힌 기술에서 아이디어를 내 가시거리가 긴 '고속도로 삼각대' '주간 택시 방범등' 등을 잇따라 특허 등록했다. 하지만 당시 상황과 여건으로 번번이 사업화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방황은 길지 않았다.

◆성실한 385위, 10위권을 뛰어넘다

전 회장의 재기에는 고향 지인들의 도움이 컸다. 사업 실패 후 1980년대 초반, 헌병대 장교로 있던 지인의 소개로 육군본부와 국방부에 부식 군납을 하면서 차츰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즈음 한국전력공사에 있던 고향 선배에게 한전 부식 납품을 부탁했고, "차라리 한전 발전소 공사를 한번 해보는 것이 어떠냐"는 선배의 제안에 건설업에 뛰어들었다.

한전 발전소 공사 경험을 바탕으로 또 다른 지인의 소개를 받아 1984년 대우건설의 부평 르망공장 건립에 참여하면서 전 회장은 일대 전환기를 맞는다. 대우건설 하청업체로 도장'미장'방수 분야 전문건설업에 전력을 쏟았다. 현 대화강건㈜의 뿌리가 되는 대화건업㈜의 시발점이었다.

전 회장은 "처음엔 150만원짜리 화장실 공사부터 안 한 게 없어. 이익이 얼마 나지 않더라도 성실 하나로 밀어붙였지. 공사 납기일은 100% 맞췄어. 신용이 뒷받침돼야 하니까"라고 말했다.

당시 대우건설 하청업체들이 대다수 해당 분야에서 도급순위 10위권 안이었지만, 대화건업은 385위였다. 하지만 성실과 신용으로 굳힌 대화건업의 명성은 업계에 널리 퍼졌고, 건설업 2년여 뒤부터 대우건설의 우수협력업체로 선정됐다. 대우는 우수협력업체에 대해 매년 물량을 20%씩 늘려줬고, 계약금의 10%를 선급금으로 지불했다. 대화건업은 몇 년 지나지 않아 도급순위 10위권을 제치고, 대우건설 전체 공사 중 도장'미장'방수 분야 공정 물량의 85%를 거머쥐었다.

전 회장은 "한창 많이 할 때는 대우 공사 46개 현장을 맡았고 한전 발전소 공사도 15개 현장을 맡았다. 하루 일용직이 1천500명씩 붙을 정도"였다고 했다.

전 회장은 1997년 말 IMF로 기업들이 줄도산할 때 오히려 최고의 성과를 냈다. 임금이 싼 대신 좋은 기술자를 골라 쓸 수 있었고, 공사 이후 정산은 오히려 제때 이뤄졌다.

건설업과 발전설비를 병행해오던 전 회장은 3년여 전부터 주춤하던 건설업에서는 손을 떼고 발전소 유지'보수만 전문으로 하고 있다.

고향을 떠난 뒤 선후배들의 도움을 받아 재기에 성공한 전 회장은 1992년부터 국제라이온스클럽에서 봉사활동에 나서고 있다. 특히 재경 구미향우회장 6년, 재경 대구경북시도민회 상임부회장 4년 등을 통해 고향 사랑을 꾸준히 펴왔고, 지난해 시도민회 회장으로 취임해 '대경학사' 건립에 올인하고 있다.

◆근면'성실이 성공의 지름길

"성실하고 부지런하면 분명히 길이 나옵니다. 비록 지금은 별로 인정받지 않는 일을 하더라도 근면'성실하면 반드시 다른 사람의 눈에 띄게 되고, 새로운 길이 생깁니다."

그는 "건설업을 할 때 새벽 5시 이후 집에 있어본 적이 없다. 지금도 오전 7시에는 경기도 부평 현장에 도착한다"며 "성실하지 않고 인정받으려는 '잔꾀'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전 회장은 약속을 하더라도 크게는 30분, 적어도 10분 전에는 약속장소에 나간다. 이로써 '(늦게 나와) 미안하다'는 입장이 아니라, '(늦게 왔지만) 괜찮아'란 입장이 된다는 것.

그는 "충분히 일찍 나올 수 있는데, 대다수 꾸물대다 늦게 나오는 것"이라며 "성실한 자세는 약속 지키기부터 시작된다. 같은 위치인데, 굳이 '미안해'라고 할 필요가 있느냐"고 했다. 전 회장의 삶과 사업 철학은 '부지런함과 성실'이다. 김병구 기자 kb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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