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누션과 엄정화가 '말해줘'를 부르며 무대를 휘젓고 원조 걸그룹 SES가 데뷔곡 '아임 유어 걸'을 부르며 1990년대를 떠올리게 만든다. 이달 3일 방송된 MBC '무한도전-토토가'의 한 장면이다. 해당 방송분의 시청률은 무려 22.2%(닐슨코리아 전국 기준). 이 프로그램의 평균 시청률보다 2배 높은 수치다. 방송이 끝난 후에도 90년대 가수들과 음악, 또 당시 문화에 대한 관심이 여전히 뜨겁다. 라디오에서는 다시 90년대 히트곡들이 흘러나오고 온라인 음원차트 상위권에 재진입하는 노래까지 나오고 있다. 2013년 말에 방송된 tvN '응답하라 1994', 그리고 지난해 JTBC '히든싱어'의 이승환'이재훈 편 등으로 예열된 '8090 키드'들의 피가 급기야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수요가 늘자 대중문화 콘텐츠 생산자들의 움직임도 바빠졌다.
재조명된 1990년대 대중문화
정장 차림의 40대 초반 대머리 직장인이 회사 동료로 보이는 이들과 막걸리를 마시고 있다. 회사 흉을 보고 연봉 문제, 자식 걱정과 주식 등 하는 이야기는 뻔하다. 그 나이대 '아저씨'들이 술집에서 흔히 주고받는 대화다. 회사 일에, 또 가장 노릇 하느라 찌든 티가 역력하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 아저씨가 돌변한 건 그다음 순간이다. 홀 천장 위에 사이키 조명이 켜지고 스피커에 유승준의 '가위'가 흘러나오자, 이 대머리 직장인이 별안간 홀 중앙으로 걸어나가며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술에 취해 흔들어대는 막춤이 아니라 유승준의 전성기를 떠올리게 하는 각 잡힌 '가위 춤'이었다. 시든 대파처럼 축 늘어져 있던 사람이 '탱탱볼'처럼 뛰어다니며 펑키스텝을 밟아 환호를 끌어냈다.
이상은 서울 홍대에 위치한 주점 '밤과 음악사이'에서 직접 본 광경을 묘사한 것이다. 이 주점은 1980년대, 또 1990년대 음악을 틀어주는 장소로 이미 이름난 곳이다. 주종은 주로 막걸리와 소주. 80년대 초등학교에 있었던 낡고 작은 책상과 의자를 사용해 향수를 자극하고, 지하에는 허름한 홀에 촌스러운 사이키 조명을 설치해 '쌍팔년도 나이트클럽'을 재현했다.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 후렴구에 맞춰 처음 본 옆 테이블 손님과 어깨동무를 한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수 있는 '8090 키드의 놀이터'다. 20대 중반도 채 되지 않은 손님은 '나이 제한'까지 두면서 입장을 거부한다. 최근 이곳은 90년대 대중문화가 재조명되면서 또 한 번 호황을 누리고 있다. 90년대를 기억하는 8090세대는 물론이고 20대 후반의 젊은 층까지 찾아와 '형'과 '언니'가 노는 물에 발을 담그고 있다.
조용히 추억을 곱씹고 싶은 이들은 홍대 주변 또는 신사동 가로수길 인근에 위치한 음악카페를 찾기도 한다. 주로 맥주 한잔을 곁들이며 80년대부터 90년대 가수들의 LP판을 듣는 장소다. 필자 역시 지난해 10월 말 신해철의 안타까운 별세 소식을 들은 후 홍대 음악카페에서 무한궤도와 넥스트, 또 그의 솔로 음반을 순서대로 들으며 '정주행'하는 시간을 가졌다.
폭발적인 콘텐츠 소비력 갖춘 세대
지난 2010년에 방송된 MBC '놀러와'의 '쎄시봉 특집'은 놀라운 파장을 일으켰다. 시청률은 20%에 육박했고, 온라인은 관련 기사로 도배됐다. SNS와 커뮤니티 및 관련기사 댓글창에는 방송 내용에 대한 호평이 쏟아졌다. 더불어 7080세대가 향유했던 그 시절의 문화가 재조명받게 됐다. 윤형주'송창식'조영남'김세환'이장희 등 출연자들은 방송 후 각계에서 밀려드는 섭외 요청에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쎄시봉 친구들'이란 타이틀의 콘서트는 하나의 브랜드가 돼 전국 각지에서 열렸고 매번 성공적인 히트율을 보였다.
그보다 앞서 KBS '콘서트 7080'이 방송을 시작한 건 2004년 말. 한동안 소식도 몰랐던 추억의 가수들을 다시 불러내 무대 위에 올리며 화제가 됐던 프로그램이다.
이후 '추억'을 소재로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생산자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90년대를 향했다. 그 시절의 스타들이 활동할 수 있는 무대와 프로그램이 생겼다. H.O.T의 토니안'문희준, NRG 천명훈, 젝스키스 은지원, god 데니안이 프로젝트 그룹 '핫젝갓알지'를 만들어 반가움을 줬다. 2013년 KBS 2TV '불후의 명곡'에서 보여준 그들의 무대는 '잘나가던 형들의 귀환'이란 수식어와 함께 이슈로 떠올랐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90년대 말 뜨거운 인기를 얻었던 그룹 god는 원년멤버 전원이 모여 컴백을 선언했다. 지난해 말에는 서태지도 신곡을 내고 방송과 콘서트에서 팬들과 재회했다. 수요와 공급이 적절하게 맞아떨어진 결과다.
콘텐츠 생산자들이 21세기 사회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8090세대에 집중하게 된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8090세대는 미디어의 눈부신 발달을 몸소 체험했고, H.O.T와 젝스키스 등으로 대변되는 아이돌문화의 시작도 직접 접한 이들이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히트곡을 일일이 공테이프에 담아 자신만의 '최신가요' 목록을 만들어봤던 세대이며, 게스 청바지와 미치코런던 티셔츠가 길거리를 수놓던 그 시절을 기억하는 세대다. 컬러TV가 보급되고 멀티플렉스가 들어서는 과정에서 성장한 '영상세대'이며 PC통신을 거쳐 인터넷 문화를 창출한 세대이기도 하다. 세월이 흘러 '책임감' '의무감' 등의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지만 사회 각계에서 주축을 이루고 있으며 가장 폭발적인 소비력을 갖춘 세대인 것도 사실이다.
이런 점들을 감안할 때 7080에 머무르던 '추억 아이템'을 90년대까지 확장시킨 건 성공적인 전략이었다. 이제 중년이 되어가는, 또 이미 중년이 된 '90키드'들의 피를 다시 끓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지난해 말 이승환의 '늙수그레한 팬'들은 '히든싱어'에 나온 '옛 영웅'의 모습에 울컥해 오랜만에 공연장으로 몰려들었다. 2014년 말 이승환의 콘서트는 연일 매진이었다. 신해철의 팬들도 그의 죽음 이후 비로소 자신들이 잠시 잊고 있었던 영웅의 존재를 다시 깨달았다. 그들을 기억하고 또 한 번 그들의 곡에 열광하는 건 '영웅'들이 무대 위에서 떵떵거리던 젊고 멋진 모습의 톱가수였기 때문이 아니다. 가장 찬란했던 한편으로는 좌충우돌하던 그 시절에 위로와 환희를 선사했던 시대의 '동지'이기 때문이다.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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