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슬람 극단주의 광기 공포와 슬픔의 현장] <3>쿠르드 참전용사 인터뷰②-야스메 이세(비

"한국전 받은 'KORE 메달' 쿠르드족 흘린 피 아직도 생생"

쿠르드족 노인 야스메 이세가 한국전 참전 메달을 보여주며 한국에 관한 기억을 이야기하고 있다.
쿠르드족 노인 야스메 이세가 한국전 참전 메달을 보여주며 한국에 관한 기억을 이야기하고 있다.

케말 압데와 그의 쿠르드 동료들은 1953년 초 한국전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고,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무렵 한국에 보내졌다. 당시 38선을 사이에 두고 상호 간 공방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시기였다. "북한군이 내려와 부대 막사를 14동이나 불태웠던 침공이 있으면서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일"도 있었다고 회상했다. 당시 쿠르드 병사들을 모질게 구박하던 중대장인 터키 장교를 죽이려고 모의를 한 사실도 있었다고 말했다. "지금도 기억하는 터키 장교의 이름인데 레샤프, 우리 쿠르드 병사들을 너무 모질게 구박해서 그를 죽일 모의까지 한 적 있었다. 중대원 100명 중 쿠르드 병사가 90명이었고 터키 병사는 10명이었다. 터키 장교는 우리 쿠르드 병사를 눈엣가시처럼 차별했고 우리의 분노는 폭발 일보 직전까지 갔다. 레샤프는 터키 병사들에게서 들었는지 이 사실을 알아채고 아예 부대를 이탈해 도망했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은 일도 있었다." 당시의 기억을 더듬으면서 그는 한 번씩 "영등포, 서울, 부산"을 습관처럼 외쳤다.

케말이 겪었던 가장 힘들었던 일은 바로 터키말 때문에 고생했던 기억이었다. "당시 우리 부대에는 대부분의 병사가 쿠르드인들이었기 때문에 터키말을 배울 기회나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터키인 장교들은 우리가 터키말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항상 구타와 고문을 일삼았고, 심지어는 우리의 머리를 밀어버리기까지 하는 처벌을 내려 우리를 매우 화나게 하였다."

그는 휴전이 성립되고 나서도 2년 더 주둔하다 1955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한국에서 돌아올 때 터키군은 그의 손에 메달 두 개만 달랑 쥐여줬을 뿐 월급은 물론 아무런 포상도 없었다. 그 뒤로부터 지금까지 살고 있는 고향마을에서 단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한국의 모습을 물었다. "당시 한국은 너무 가난하고 비위생적이어서 우리는 한국 사람들이 주는 물조차 마시지 않았고, 도리어 한국 사람들에게 우리가 가진 빵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정말로 순박했고 마음이 따뜻했다는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지금까지도 장례식 행렬에서 '아이고'라는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는 회상을 하면서 인터뷰를 마쳤다.

쿠르드 참전용사 인터뷰②-야스메 이세(비르단)

끝없이 펼쳐진 메소포타미아 광야를 10분 정도 달리다 보면 지척에 보이는 코바니는 포연이 자욱하게 싸여 있지만 양과 염소들, 쿠르드 목동들의 고함 소리는 잠시나마 전쟁의 공포를 잊게 한다. '쿠레무사'라는 작은 마을로 들어서니 지팡이를 짚고 '케피예'를 머리에 두른 한 노인이 마을 어귀에 앉아 있었다. 한국전에 참전했던 용사라고는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힘없이 지팡이에 의지한 채 앉아 있는 노인은 중동세계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아랍 노인의 모습 그대로였다.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음미하는 듯 석양이 지는 서쪽 하늘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는 노인의 모습을 보노라면 인생의 무상함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우리 일행이 그에게 "코레"라고 외치자 어디서 갑자기 기운이 솟았는지 금방 손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코레'라고 큰소리로 대답했다. 너무도 쉽게 역전의 용사를 찾아낸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는 우리 일행을 보자 금방 자리에서 일어났고 기운을 되찾은 듯했다. 곧이어 그의 가족들이 몰려나와 의자를 가지고 나오고 차를 데워오면서 금방 자리가 만들어졌다. 조금 있으니 그의 아들이 한국전쟁 참전 메달을 가지고 나왔다. 유엔의 상징이 새겨지고 'KORE'(코레'한국)라고 새겨진 메달로 이전에 케말이 가슴에 달고 있던 메달과 같았다.

야스메 이세(1932년생, 터키식 이름 야스메 비르단)는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한국으로 보내졌다. 터키 제2의 대도시 '이즈미르'에서 군사훈련을 받던 중에 갑자기 한국으로 보내졌다. 당시 그는 8소대 소속으로, 소대원은 50명이었는데 21명이 쿠르드 병사들이었고 29명이 터키 병사들이었다. 한국에는 한국전이 끝나던 해인 1953년 초부터 1954년 초까지 1년을 주둔하다 돌아왔다.

야스메는 쿠르드의 시골 마을에 살면서 어릴 때부터 양과 염소를 돌보는 일을 했고, 도시에 있는 학교까지 갈 형편이 되지 않아 아예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당연히 군에 입대하기 전까지 터키말은 전혀 할 수 없었고, 터키어는 터키군에서 배울 수 있었다. 물론 터키 병사와 함께 생활하면서 배웠지만, 터키어 때문에 많은 고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 중인 한국으로 가기 싫었지만 개인적으로 전혀 반항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한국으로의 여행은 길고 험난했다. "터키에서 한국으로 배를 타고 24일 동안 밤낮으로 항해한 후에 도착한 곳은 부산이었다"고 말했다. '부산'이라는 도시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기억 속의 한국은 너무 못살았다는 것이다. 당시 너무 가난해 군인들이 행진하는 길 양편에 늘어앉아 음식을 구걸하는 한국 사람들의 모습을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터키 빵을 '찹찹'이라고 부르면서 구걸했다는 것이다.

야스메가 투입됐던 한국전의 상황은 상당히 치열했다. 휴전회담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한 치의 땅이라도 더 획득하기 위한 전투는 상당히 격화된 상태였다. 야스메는 터키 여단이 휴전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중공군과 치른 전투에 투입됐다. 야스메가 싸웠던 전투를 일명 '네바다 전투'라고 한다. 중공군은 터키 여단이 확보하고 있던 네바다 전초(前哨)를 1953년 5월 28일 야간에 2개 연대를 교대로 투입하여 공격하였다. 이날 밤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터키 여단은 다섯 번이나 '베가스' 고지를 점령당했으나 역습으로 다섯 번 다 그곳을 되찾았다. 그러나 네바다 전초 중에서 '카슨' 전초는 상실하였으며 '엘코' 전초는 간신히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전투에서 여단은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격전을 치렀으나 중공군의 공세가 계속되자 사단이 더 이상의 인명 피해를 낼 수 없다는 판단 하에 '네바다 고지'에서의 철수를 승인함에 따라 여단은 이 전초에서 철수하였다. 야스메가 소속된 부대에서도 상당수의 전사자가 나왔다. 그는 죽지 않고 가까스로 살아 돌아왔지만, 그와 함께 싸웠던 부대원 중 많은 수가 죽어갔다. 이 얘기를 하면서 야스메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옛날 함께 싸우다 죽어갔던 쿠르드의 전우들이 생각나는지 눈에서는 이슬처럼 눈물이 맺혔다.

당시 든든한 힘이 되어줬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와 함께 한국전에 참전했던 동향의 친구들이었다. 같은 고향인 수르츠 지역에서만 8명의 쿠르드 병사가 한국전에서 함께 싸웠다고 회상했다. 그리고 고향 친구인 '살리 카도'는 한국전에 참전했다가 터키군에서 제대한 후에 한국 여인과 결혼해 한국에서 살다가 8년 전에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당시에 무엇보다도 나를 화나게 했던 일은 한국전에 참전했던 우리 병사들의 월급을 한 달에 80달러로 알고 있었는데 다 떼어먹고 5달러만 지급했다. 당연히 나머지 75달러는 터키군 지휘관들이나 장교들이 모두 도둑질해 먹었다"고 언성을 높였다. 당시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아무런 보상도 주어지지 않고 월급마저 뺏긴 일은 팔순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있는지 이 얘기를 할 때 갑자기 목소리가 커졌다.

인터뷰를 끝내면서 한국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를 물었다. "제발, 우리 쿠르드민족의 피를 잊지 말았으면 하는 부탁을 드린다. 난 지금도 한국의 어디에서 싸웠는지 잘 모르지만 어쨌든 수많은 쿠르드 친구들이 죽어갔다는 사실을 기억해줬으면 해요. 한국이라는 나라가 지금 발전하게 된 초석에는 우리 쿠르드 민족의 피도 함께 배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합니다."

하영식 객원기자(국제분쟁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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