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계의 창] 위기의 러시아 '누구의 죄이며, 무엇을 할 것인가?'

유가 하락'루블화 폭락 '경제위기', 애국심으로 극복하는 러시아인들

1971년생. 경북대 노어노문과 석사(러시아 현대소설). 러시아 모스크바 국립사범대 박사. 경북대 교수
1971년생. 경북대 노어노문과 석사(러시아 현대소설). 러시아 모스크바 국립사범대 박사. 경북대 교수

푸틴에게는 위기적 상황이 곧 기회, 우리 이웃이 어떻게 극복할지 흥미

러시아가 지난해처럼 우리 관심을 끌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소치 올림픽 종합 우승을 위해 김연아의 금메달을 '훔쳐' 가기도 했고, 크림반도를 둘러싼 긴장된 분위기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유가 하락과 루블화 폭락으로 인한 경제위기 관련 소식이 자주 들린다.

1998년 우리나라가 IMF사태의 쓴 눈물을 삼키고 있을 때, 한때 미국과 더불어 냉전시대 초강대국이었던 러시아는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 당시 러시아인들을 괴롭혔던 것은 팍팍한 현실보다도 오히려 바닥까지 떨어진 그들의 자존심이었다. 불과 한 세기 동안 공산주의 혁명과 두 번의 세계대전, 소련의 붕괴라는 드라마틱한 사건을 겪으면서 격변에 익숙해진 러시아인들도 그때는 적잖은 당혹감을 토로했다.

그래서였을까, 다음 해 대통령이 된 푸틴은 수많은 의혹과 독재 행각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를 다시 일으키고 '경제를 살린' 지도자로 국민 대다수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런데 최근 그의 지도력이 다시 시험에 처해 있다. 유가 하락과 서방의 경제제재 조치로 인한 루블화 급락, 그로 인한 국가 신용등급 강등 등 러시아는 국가부도의 위기에 처했던 1998년의 악몽을 다시 겪는 것 같다. 2014년 2월 러시아 방문 당시 30루블 전후였던 달러당 환율이 학회 참석차 10월에 방문하니 40루블로 폭락해 있었다. 중앙은행의 금리 인상과 국가의 적극적 개입에도 불구하고 최근 환율은 여전히 달러 당 50~60루블 선에서 요동치고 있다.

크렘린 바로 앞 마네지 광장의 맥도날드는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위생 점검을 통과하지 못했다는 서류가 잠긴 출입구에 붙어 있었지만, 실은 미국 자본의 얼굴격인 맥도날드에 대한 러시아 정부의 소심한 복수로 보였다. 맥도날드는 소련 개방의 신호탄이었고, 그 앞에 늘어선 긴 줄은 자본주의 러시아라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상징이기도 했다. 추웠던 10월의 모스크바, 시내 상점들에서 유럽이나 미국산 식자재를 찾아보긴 어려웠다. 대다수 러시아인은 이쯤은 참아낼 수 있다며, 원래 자기 땅이었던 크림반도를 합병한 게 뭐가 문제냐는 반응이었고, 서방의 제재는 국정간섭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며칠 전 페테르부르크대학 교수에게 러시아인들이 좋아하는 질문 두 가지를 던졌다. 도대체 지금 이 상황은 '누구의 죄인가'(게르첸의 소설 제목), 그리고 '무엇을 할 것인가'(체르니셰프스키의 소설 제목) 말이다. 그는 이 어려운 질문을 웃음으로 무마하면서, 러시아인들은 '애국심'으로 이 상황을 극복할 것이며, 오랜만에 겪는 '익숙하고도' 가슴 뛰는 경험이라며 냉소했다. 그는 이런 일을 겪어보지 못한 1990년대 이후 출생한 세대가 걱정이라고 했다. 그래도 가장 좋아하는 명절인 새해는 축하할 일이고, 1월 7일 정교회 크리스마스까지 이어지는 긴 휴가는 즐기고 봐야 되지 않겠느냐며 전화를 끊었다.

이 '애국심'이란 단어가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던 것은, 러시아 역사에서 이 말이 여러 차례 막강한 위력을 발휘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에게도 무릎을 꿇지 않았던 나라, 900일에 걸친 히틀러의 도시 봉쇄와 백만 명의 시민이 죽어나갔음에도 투항하지 않았던 레닌그라드 시민들, 문화와 예술의 나라라는 자긍심을 지니고 살아가는 이 나라 사람들에게 '명예', 그중에서도 '국가의 명예'는 그들이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가치이다.

푸틴은 과연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어떤 면에서는 이 위기적 상황이 그에겐 오히려 기회이기도 하다. 언론 탄압과 독재 정치로 인해 촉발된 반(反)푸틴 운동이 외부로부터의 압박에 오히려 잠잠해지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시즘(Marxism)과 스탈리니즘(Stalinism)보다 더 가혹한 것이 '푸티니즘'(Putinism)이라고 대통령을 비판하던 지식인들의 목소리는 '애국심'이라는 구호에 잦아들고 있다.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있는 느리고 둔중한 우리 이웃이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는 대단히 흥미롭다. 멀게 느껴지는 이 나라의 운명이 실은 근대 이후 우리나라의 역사와 가장 깊숙이 연관되었음도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윤영순/경북대 교수·노어노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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