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유리문 안에서

이른 잠에서 깨어 유리문 안으로 비치는 흐릿한 한 줄기 빛을 바라본다. 새벽은 어떤 막에 싸여 새끼를 낳는 어미처럼 온몸을 비틀어 결국 물컹한 것을 바닥에 툭, 던져놓는다. 푸들푸들 한기를 털며 겨우 일어서보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잠시 버티고 있다.

어느 한순간이 깨어나듯, 덥고 푸른 김이 금방 식어버릴 때, 반쯤은 눈썹에 가려 눈곱 낀 눈, 그 눈으로 낯선 그림자가 들어왔다. 햇살은 머지않아 흙바닥에 발을 디디는 그 순간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어린 양처럼 고불거리는 짧은 털을 세우기 시작했다. 어제와 다르지 않게 짐승들이 먼저 울어주었고 홀로 계시는 앞집 할머니 아궁이에 연기도 피어오르고, 경운기 시동 거는 소리로 옆집의 안부도 확인했다. 다들 밤새 안녕하시니 염려하지 않아도 되겠는데 괜히 평온한 아침이 불편해서 트집이라도 잡고 싶은지 유리문 곁에 바짝 붙어본다. 꼬박꼬박 아침이 온다는 것, 발이 시리다는 것, 털모자가 없다는 것, 설거지랑 빨래는 밀려 있고, 당신과 말다툼도 없이 아직 냉전 중이라는 것,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상을 곱씹어본다.

가령 가로등이 너무 환해서 아침이 오지 않는다거나, 아침이 없으면 어둠도 돌아간다거나, 사랑이 없으면, 눈도 오지 않는다고, 눈이 오지 않으면 기다림도 더 이상 견디지 못해 녹아버리겠지. 누군가 최선을 다했지만 그것이 최고가 될 수는 없다는 것, 슬픔이 찾아오지 않으면 두려움이 더 커진다는 것, 이런 것들이 오늘 아침 염려에 들기나 할까. 언제부턴가 읽어도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시들이 날개를 달고, 매일 만나는 당신조차 낯선 활자처럼 냉랭하기만 하다. 누군가를 위해 우는 것도 이제 예의가 되어버렸고, 당신과의 이별도 스마트폰의 액정화면처럼 다시 깔면 그만이다. 단지 시린 입속으로 찬바람이 밀고 들어올까 얼굴까지 지퍼를 채우고 앞만 보고 걸어가는 우리에게 염려가 말을 걸기나 할까.

언덕 아래 못물은 얼었다 풀렸다를 반복하고 있다. 얼었던 시간보다 풀렸던 시절이 더 길었는데도 우리를 염려하게 하는 것은 뭘까. 남들 다 봤다는 '국제시장'을 아직 못 봤다고 해서 동동거릴 필요는 없지만, 가끔은 같이 가라앉고 싶을 때도 있는 것일까. 이 새벽 어디에선가 가축들의 입김이 언 땅속으로 묻히고, 아들의 시린 한쪽 귀를 위해 털 귀마개를 샀지만 정작 당신의 귀가 더 얼어붙고, 여전히 갑은 을을 무릎 꿇게 한다. 겨울은 너무 빨리 어두워져 두려웠지만, 그래서 못물은 침잠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홀연히 이른 새벽에 깨어 제대로 얼어붙지 못하고 풀리기만 나를 염려해 본다. 밖이 꽤 차가운지 유리문도 성에 낀 채 묵묵하다. 당분간 이 추위를 견뎌낼 온기가 없을까 염려되는 아침이다.

이 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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