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목요일의 생각] '스마트' 세상의 의미

나는 길치 중에서도 심각한 길치다. 길치의 삶에는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가장 불편한 점을 꼽으라면 여행이 남들보다 조금 더 고달프다는 것이다. 친구랑 단둘이 미국 배낭여행을 할 때였다. 친구와의 갈등은 언제나 '길 찾기'에서 비롯됐다. 방향 감각이 뛰어난 친구와 나는 툭하면 길 찾는 문제로 언쟁을 벌였다. 물론 승자는 항상 친구였다. 갈등은 뉴욕 여행 중 극에 달했다. 뉴욕은 복잡한 도시지만 동서남북에 대한 명확한 개념만 가졌다면 길 찾기는 수월하다. 물론 나에게만은 예외였다. 지하철에서 내릴 때마다 그녀와의 의견 충돌이 있었고 미묘한 갈등은 더 큰 화를 불러오기도 했다.

길치의 습성은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피해를 주기도 한다. 길을 물어오는 사람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알려줘 뒤늦게 속으로 사과의 뜻을 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대학 졸업식 때의 일이다. 학사복을 입은 나에게 학부모로 보이는 중년 부부가 길을 물어왔다. 이번에는 자신 있었다. 길을 알려주고 뿌듯한 마음으로 부부와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던 중 그들이 물었던 목적지와 마주쳤다. 4년 넘게 닳도록 다닌 길인데 틀렸다니. 스스로 부끄러웠다.

돌이켜보면 내가 길치가 된 이유는 하나다. 혼자 힘으로 길을 찾아본 일이 드물기 때문이다. 학창시절에는 언니나 친구들만 믿고 따라다녔고 여행을 떠났을 때도 가족들이나 다른 구성원의 힘을 빌렸다. 세상이 '스마트'해진 뒤로 나의 길치 습성은 악화됐다. 차 안에서는 내비게이션에, 길을 걸을 때는 스마트폰에 의지했던 탓이다. 머릿속에 길 찾기를 담당하는 기관이 있다면 아마 녹슬어서 무너지기 일보 직전일 것이다.

얼마 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세계 최대 가전박람회가 열렸다. 박람회에 참가한 기업들은 '미래 집안'을 꾸며 선보였다. 미래 집안의 모습은 대부분 이러했다. 주인이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면 저절로 조명이 켜지고 커피 메이커가 알아서 커피를 내린다. 주인이 외출한 사이 로봇 청소기는 청소를 시작하고 조명은 알아서 꺼진다. 주인의 직접적인 행동이 없어도 집안은 이렇게 관리됐다.

언뜻 보면 참 편리하다. 하지만 설렘보다는 걱정이 앞선다. 사람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점점 줄어드는 게 아닌지 두려워서다. 물론 기술의 발달은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해준다. 하지만 지금까지 큰 불편 없이 해왔던 일들, 이를테면 불을 켜고 끄거나 커피를 내리는 일들까지 기계에 맡겨야 하는지 의문이다.

먼 미래에는 길 못 찾는 것쯤은 애교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어쩌면 기술 발달은 작은 일에도 어려움을 겪는 수많은 종류의 '~치'(癡)를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무수히 많은 새해 목표를 세웠지만 반드시 지키고 싶은 것은 '내비게이션과 멀어지기'다. 길 위에 낭비될 기름이 벌써 걱정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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