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우리 젊음을 불태웠던 그때가… '귀환' 1990년대

#1. 엄정화의 '포이즌'과 '초대', 터보의 '화이트 러브', 구피의 '비련'. 이 네 곡은 기자가 2015년 1월 7일 동성로와 반월당 인근을 지나면서 들은 노래들이다. 엄정화의 '포이즌'과 '초대'는 1998년, 터보의 '화이트 러브'는 1996년, 구피의 '비련'은 1997년에 나온 노래들이다. 눈에는 2015년의 풍경이 보이는데 귀에는 1998년의 음악이 들리면서 마치 지금이 2015년인지 1998년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2. 대구 중구 동성로 교보핫트랙 대구점은 이달 4일 1990년대 유행했던 가요들을 매장 내에 배경음악으로 틀었다. 그러자 매장에 있던 손님들의 반응이 갑자기 미묘하게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손님까지 있었다는 매장 직원의 증언도 있었다. 이게 다 지난 2주간 방영된 한 TV 프로그램의 영향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27일과 이달 3일에 방송된 MBC '무한도전'의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토토가) 특집이 만들어낸 '1990년대의 추억' 열풍이 뜨겁다. SNS는 물론이거니와 많은 사람들이 1990년대를 추억하고 기억하기에 여념이 없다.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지금의 30대들은 지금 '육체가 떠날 수 없다면 영혼이라도 떠나야겠다'는 심정으로 자신만의 1990년대를 복기하고 있었다.

이번 주 매일신문은 1990년대로 시간여행을 떠나려 하는 이들을 위한 안내서를 마련했다. '토토가'로 촉발된 1990년대 문화에 대한 향수를 전반적으로 짚어보고, 음악으로 1990년대를 풀어보기도 할 것이다. 1990년대 동성로의 찬란한 기억들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만의 추억의 장소를 들어보기도 할 것이며, 1990년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가졌을 법한 '팬질의 추억'도 꺼내봤다.

이화섭 기자 lhsskf@msnet.co.kr

◇왜? 그토록 찬란했던가, 우리 젊음을 불태웠던 그때가…

"오늘 술 먹자고 꼬시지 마라. 치킨 시켜서 토토가 볼 거다."

MBC '무한도전-토요일토요일은가수다(토토가) 특집' 2부가 방송되던 지난 3일 한 네티즌이 자신의 SNS에 남긴 글이다. 이 네티즌은 "지난해 12월 27일에 했던 무한도전 토토가 특집을 보고 정초부터 노래방에서 친구들과 1990년대 노래 부르면서 댄스 삼매경에 빠졌었다"며 "중학생 때 이후로 이렇게 놀아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고 SNS에 글을 올리기도 했다.

◆차트를 돌려버린 토토가 열풍

지난달 27일과 이달 3일에 방송된 MBC '무한도전'의 '토토가' 특집의 후폭풍은 너무나도 컸다. '토토가 특집'의 시청률은 최근 '무한도전'이 기록한 시청률 중 가장 높은 22.2%를 기록했으며 엔딩무대인 '트위스트 킹'의 순간 시청률은 35.9%를 기록했다. 이는 당대 최고의 아이돌 가수들이 나온다는 연말 가요시상식 평균 시청률인 10%보다 훨씬 높은 수치였다.

음원사이트의 앨범차트는 토토가 특집에 출연한 가수들의 앨범이 대거 상위권에 올라 마치 1990년대 음반차트를 보는 듯했다. 가온차트에 따르면 지난달 28일부터 이달 3일까지 디지털 차트를 살펴보면 '토토가 특집'에 나왔던 노래 15곡이 100위권 안에 안착했다. 가장 인기가 많은 곡인 터보의 'Love is'는 199계단 뛰어올라 12위를 기록했고, SES의 'I'm your girl'은 노래방 차트에서 순위가 이전 주보다 326계단 뛰어올라 63위를 기록했다. 또 음원사이트인 벅스의 앨범차트에서는 터보의 2집인 'New Sensation' 앨범이 9일 현재 9일 동안 차트 1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토토가 특집에 출연한 가수들의 앨범 대부분이 앨범차트 50위권에 안착하고 있다. 음악에서 불어온 90년대 복고 바람은 차트의 풍경을 90년대로 돌려놓을 정도로 거셌다.

◆소환은 이미 시작됐었다

지금의 90년대 열풍이 '토토가 특집' 때문에 촉발된 것처럼 보이지만 90년대를 추억하는 문화콘텐츠는 이미 몇 년 전부터 복고 바람을 타고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영화 '건축학개론'과 같은 해 tvN에서 방영된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이었다. 그때도 언론에서는 '90년대의 추억'을 이야기하기에 바빴고, H.O.T.와 젝스키스로 대변되는 90년대 팬덤문화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지기도 했다. 이 열풍은 지난해 '응답하라 1994'의 열풍으로까지 이어졌다.

90년대 복고열풍은 영상매체에서만 끝나지 않았다. 영화와 드라마로 시작된 바람은 이내 공연 시장으로 이어졌다. 2012년 첫 공연을 연 '청춘나이트' 콘서트는 90년대 활동한 가수들의 합동공연으로 지금까지 총 27회 공연으로 전국 13만 관객을 불러들였다. 출연진들을 살펴보면 소찬휘, 김현정과 같이 '토토가 특집'에 나왔던 가수들뿐만 아니라 김원준, 룰라, DJ DOC 등 90년대에 큰 인기를 끌었던 가수들이다.

패션 또한 90년대 바람을 피해가지 못했다. 그 바람을 직격으로 맞은 아이템은 '응답하라 1997'의 흥행으로 90년대 말 대유행을 했던 '더플코트'가 당시 등장했다. 일명 '떡볶이 코트'라 불리며 당시 학생들이 교복 위에 덧입던 더플코트는 2년 전 한 스포츠브랜드에서 복고 콘셉트로 출시된 뒤 지금은 일부 캐주얼브랜드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아이템이 됐다. 또 한 인터넷쇼핑몰에 따르면 지난달 27일부터 이달 4일까지 SES의 바다가 착용했던 스타일의 머리 방울의 판매량이 그 전 달에 비해 5배 늘었고, 핑클이 착용했던 니삭스(무릎까지 오는 양말)는 같은 기간 비교 결과 판매량이 4배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찬란했기에 다시 불러낸다

지금 불고 있는 90년대 복고 열풍의 가장 큰 특징은 이 열풍을 즐기는 연령층인 30대가 그 시절을 찬란했던 시절로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1997년 IMF사태가 오기 전까지 90년대는 우리나라에 다시 없을 명실상부한 '본격 문화 소비 시대'였기 때문이다. 대중음악평론가 권오성 씨는 "90년대에 10대, 20대를 보낸 사람들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문화를 구매한다는 경험을 해 본 세대"라며 "이들이 적극적으로 문화를 소비했고 카세트테이프나 CD와 같이 물리적인 문화콘텐츠를 소유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던 마지막 세대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즐겼던 문화 소비에 대한 열망이 한 TV 프로그램에 의해 되살아난 것"이라고 말했다.

90년대의 노래들이 지금의 아이돌 음악과 다르게 전 세대를 아우르는 힘을 가진 음악이었다는 점도 지금의 1990년대 열풍에 한몫하고 있다. 예를 들어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은 그 당시만 해도 매우 빠른 랩 부분을 다 알아듣고 따라부를 수 있느냐를 두고 신세대와 기성세대를 가를 정도로 90년대 당시 신세대들의 아이콘과 같은 노래였다. 그렇다고 기성세대들이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에 대해 뻣뻣한 자세로 듣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강호정(26) 씨는 "어머니와 함께 토토가 특집 보면서 어머니가 '조성모가 불렀던 그 노래 참 좋았는데'라고 하시더라"며 "그때 그 노래를 50대인 어머니도 알고 계신다는 점이 흥미로웠다"고 말했다.

이번 90년대 복고 열풍이 결국 힘들어하는 지금의 20대, 30대들에게 숨어 있던 '좋은 시절'의 추억을 건드렸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다. 문화평론가 박지형 씨는 "토토가 특집에 나온 노래들을 들으며 각자의 추억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며, "그 노래가 유행하던 시절은 청년의 삶이 지금처럼 각박하지 않았을 때였고 우리나라에서 청년 계층이 마지막으로 활기찼던 시대였기 때문에 그때 노래가 더 긍정적으로 들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2012년 방영된 tvN드라마 '응답하라 1997' 1화에서 주인공 성시원(정은지)은 "서른셋, 벌써 추억을 논하는 나이가 되었다고 슬퍼하기엔 우리의 90년대는 너무나 찬란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성시원은 광안고 동창들과 만나며 "육체가 떠날 수 없다면 영혼이라도 떠나는" 90년대 여행을 한다. 지금의 90년대 복고 열풍은 그렇게 잠시동안 영혼이 떠나는 여행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 여운이 얼마까지 길게 갈지 모르겠지만 오늘도 '밤과 음악사이'나 '청춘나이트' 같은 곳에서 추억여행을 떠난 사람들은 그 여운이 주는 힘으로 또다시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고작 음악 한 곡이 주는 위로'를 진통제 삼아서.

이화섭 기자 lhssk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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