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무한도전 '토토가'(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 열풍으로 때아닌 특수를 누리는 곳이 있다. 바로 '밤과 음악 사이'(이하 밤사)다. 1990년대 가요를 틀어놓고 춤추는 장소인 밤사는 적당히 늙어야(?) 환영받는 곳이다. 90년대는 불러낼 향수가 많다. 요즘 노래는 기를 써도 가사가 외워지지 않는데 그 시절 노래는 도입부만 들어도 가사를 흥얼거리며 몸을 들썩이게 된다. 이달 13일, 90년대 가요 속 추억을 찾아 대구 중구 삼덕동의 '밤사'(현 청춘 나이트 음악이 흐르는 밤)를 찾았다.
◆밤과 음악 사이에 서다, '밤사' 관찰기
화요일이었던 이달 13일 오후 9시. 밤사가 자리 잡은 골목으로 들어서면 '청춘 나이트'라고 적힌 네온사인이 시선을 잡아끈다. 간판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애들은 가라!'는 작은 글귀다. 이 한 문장에는 밤사의 운영 철학이 담겨 있다. 어릴수록 환영받는 클럽과 달리 밤사는 70'80년대생이 대접받는 곳이다. 그래서 입장 연령 제한도 있다. 남자는 90년생, 여자는 91년생부터 입장할 수 있어 여기서 만날 수 있는 가장 어린 여성의 나이가 스물다섯이다.
평일 밤 9시는 밤사를 찾기에 적절한 시간대가 아니다. 밤사에 청춘남녀가 대거 유입되는 시간은 금요일과 토요일 밤 10시 이후다. 이때는 줄을 서서 들어가야 할 만큼 외로운 영혼들로 골목 일대가 붐빈다. 평일에는 없는 입장료가 이 날짜에만 있는 것도 수요와 공급 원칙에 따른 것이다. 입장료는 남자 1만5천원, 여자 1만원. 남녀 입장료가 다른 이유에 대해 밤사 DJ이자 매니저인 박상원 씨는 "여성 고객들이 많아야 남자분들이 따라온다. 모든 유흥업소에 해당하는 사항"이라고 말했다.
밤사는 클럽이나 나이트와 구별되는 장소다. 가사를 이해할 수 없는 빠른 외국 음악과 이성 간 '부비부비'(몸과 몸을 비비는 행위)가 성행하는 클럽은 춤과 음악보다 '부킹'이 먼저다. 하지만 밤사는 음악이 주가 되는 곳이다. 곳곳에 과거 추억을 건드리는 소품도 있다. 90년대 그 시절 대세 걸그룹 SES부터 젝스키스, god의 브로마이드가 빛바랜 추억이 돼 여기저기 걸려 있다. 밤사는 안주도 많이 판다. 어묵탕과 참치 김치찌개, 골뱅이 무침과 떡볶이 등 안주 종류는 어림잡아도 서른 가지가 넘는다. 일단 배고프면 허기를 채우고 춤을 춰야 한다. 박 씨는 "그냥 술 마시고 춤추는 곳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밤사에는 그 시절 음악을 들으러 오는 사람들도 많다. 물론 남녀가 만나서 눈이 맞으면 어쩔 수 없다"고 웃어넘겼다.
◆공감하며 노래 듣고, 같이 춤추는 재미
밤 10시. 비었던 테이블이 무리 지어온 손님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기자 뒷자리에 앉은 남자 하나, 여자 넷의 무리를 힐끔 쳐다봤다. 처음엔 그들의 나이를 20대 중반으로 추측했지만 1997년에 나온 노래인 지누션의 '말해줘'에 맞춰 '와이퍼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평균 연령을 20대 후반으로 높였다.
밤사의 손님들을 보면 이 공간의 특징이 드러난다. 첫째, 과하게 꾸민 손님이 별로 없다. 이날 본 여성 고객들은 대부분 청바지에 운동화, 모자에 털이 달린 점퍼를 입고 있었다. 두꺼운 등산용 양말을 운동화 안에 신고 온 여성도 눈에 띄었다. 추운 날 멋보다 방한에 더 신경 쓰는 나이대의 손님들이다. 밤사 취재를 앞두고 무엇을 입어야 할지 고민하는 기자에게 이곳 관계자가 "편하게 입고 오면 된다. 다만, 슬리퍼에 트레이닝복 차림은 곤란하다"고 말했던 것이 기억났다.
둘째, 노래별로 춤이 달라진다. 강원래가 속했던 그룹 '클론'의 노래가 나오면 양손을 바람개비처럼 돌리고, 김현정의 '그녀와의 이별'에 맞춰서 모든 손님이 손을 앞뒤로 크게 흔드는 군무를 완성했다. 이렇게 노래를 듣고 같은 춤을 추며 우리는 한 시대에 태어났다는 동질감을 형성했다. 이날 기자와 동행한 90년생 김모 씨는 "클럽은 여자들이 남자 눈을 의식하며 예쁘게 춤을 추는데 여기 온 여자 손님들은 진짜 노래 듣고 춤추러 온 거 같다. 회식 자리 같은 분위기"라고 분석했다.
바로 옆 클럽을 두고 사람들은 왜 밤사를 찾는 걸까. 한 달에 두 번 이상 밤사를 찾는다는 서성민(27) 씨는 "클럽에는 애들(?)이 너무 많다. 클럽 음악은 템포가 빠르고 비트도 강해서 현란한 춤을 추면 금방 지친다. 하지만 밤사는 한 템포 쉬어갈 수 있는 음악이 많다"며 "술 마시면서 90년대 그 시절 노래를 듣고 모르는 사람들과 비슷한 춤을 추면 공감대가 형성된다"고 말했다. 수많은 90년대 곡 중에 춤추기 좋은 노래는 따로 있다. 서 씨 옆에 있던 남성은 "HOT 노래는 '캔디'가 좋고, 유승준, 터보, SES 노래도 춤추기 좋은 곡이 많다"고 덧붙였다. 기자가 SES 노래는 여자 춤이 아니냐며 고개를 갸우뚱하자 "SES는 춤이 간단해서 따라하기 쉽다"고 설명했다.
◆좋았던 그 시절의 기억, 노래에 추억 담아 판다
밤사는 노래로 추억을 판다. 더 세련되고, 더 새로운 것이 대접받는 시대에 살면서 우리는 과거의 좋았던 기억을 노래를 통해 떠올리는 것이다. 밤사에서는 DJ의 역할이 크다. 무게 잡으며 영어 랩을 외는 게 아니라 서로 공유하는 감성에 호소한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바비킴의 '고래의 꿈'이 나오면 "나는 중학생 때 고래를 잡았는데, 엄마가 자장면 사준다고 해서 따라갔더니 병원이었다"며 '개그콘서트'같은 멘트를 치고, 핑클의 '영원한 사랑'이 나오면 무대에서 춤추는 여성 네 명을 가리키며 "여기 네 명 핑클 딱이네! 누가 옥주현인데?"라고 묻는다.
1993년 히트를 쳤던 철이와 미애의 '너는 왜'는 '때밀이 춤'으로 유명한 노래다. DJ가 "다 같이 때밀이 춤!"하고 외치면 점잖게 앉아있던 남자 직장인 무리도 맥주를 들이켜다가 앉은 자리에서 팔을 양쪽으로 뻗어 때밀이 춤을 췄다. 밤사의 마스터 DJ인 한지훈 씨는 "HOT 노래가 나오면 완벽하게 안무를 완성하는 손님들도 있는데 어릴 때 댄서로 일하다가 지금은 평범한 직장에 다니는 친구들이 여기 와서 숨은 끼를 발산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DJ도 밤사를 즐길 수 있는 연령대다. 한 씨는 아무리 나이를 캐물어도 말해주지 않다가 "1970년대에 태어났다"고만 살짝 알려줬다.
요즘 밤사는 '토토가'(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 열풍 덕을 많이 보고 있다. 2010년 10월 문을 열었는데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호황이다. 한 씨는 "요즘은 주말이 되면 골목 끝까지 줄을 선다. 테이블이 꽉 차도 서서 춤추려고 사람들이 입장료만 내고 들어올 정도"라며 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사진을 스마트폰으로 보여줬다. 토토가가 인기가 끈 뒤 밤사의 노래 선곡에도 변화가 생겼다. 예전에는 영턱스클럽, 듀스 노래도 많이 틀었다면 요즘은 소찬휘, 김건모, 쿨, SES처럼 토토가에 나왔던 가수들 노래가 주류가 됐다.
자정을 향해 가는 시각. 밤사는 더욱 달아올랐다. 취재를 끝내고 나서려는 기자에게 한 씨가 "신청곡도 받는다"며 듣고 싶은 노래 하나를 고르라고 했다. 기자가 신청한 노래는 1997년 발매된 유승준 1집 앨범에 수록된 '가위'. 한때 '오빠'라고 부르며 노래 가사를 다 외고 다녔던 나의 사춘기가 그 한 곡에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내 손을 잡아봐~ 어디든 함께 갈테니~' 그 가사처럼 그 손을 잡고 90년대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다.
글 사진 황수영 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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