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흰빛을 걸다

▲이 향
▲이 향

가까운 사람을 멀리 떠나보낸 이는 안다. 어쩔 수 없이 잡은 손을 놓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가족이라는 묘한 테두리를 두르고 살았지만 어느 순간 스르르 그 테두리를 허물고 빠져나가는 게 있다는 것을. 아무리 팔을 넓게 벌리고 서로 힘을 다해 꽉 붙잡아보지만 우리에겐 보이지 않는 문이 있음을 어렴풋이 알 때가 있다. 그럴 때는 한 번도 잡아본 적이 없는 것처럼 가없이 멀어지기만 하는 것이 있어, 마치 지금껏 우리가 붙잡고 온 것이 허공이었는지 몸부림칠 수록 더 먼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이 있다.

언니를 보내는 의식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흐트러진 신발들을 집게로 집어 단정하게 정리했고, 그녀를 아는 이들은 같은 색의 옷을 입고 파도처럼 밀려왔다가는 또 빠져주었다. 무슨 규칙처럼 정해진 짧은 애도는 벌건 국 국물에 밥 한술 급하게 말아 먹고는 돌아갔다. 흰 비닐이 깔린 상 위에는 먹다가 만 수육 몇 점이 엉겨 붙고 비우다가 만 술잔들이 엎질러지고, 누군가가 또 바쁘게 상을 갈았다.

영정사진 속 그녀는 여행길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여기에서 잠시 머물 뿐이라는 걸 그녀는 미리 알기라도 한 것일까. 목적지가 어딘지를 모른 채 기약 없는 여행을 배웅하는 길, 향이 어떤 기도처럼 고요히 이어지고 있었다. 그녀가 가는 그 길이 부디 환하기를, 우리의 기도가 늘 그녀와 함께 닿아 있기를 간절함을 담아 보내지만, 그러나 서로에게 들키지 않게 마음속으로는 더 붙잡고 있었다. 한 줌의 흰 가루를 가슴에 안고 남은 식구끼리 등 돌린 하늘을 올려다보는 시간, 그녀도 분명히 우리에게 긴 인사를 남기고 있었겠지. 어떤 말도 위로가 될 수 없기에 침묵이 있고, 눈물이 있는 것일까. 무겁고 추운 눈빛만 보내다 각자 신발을 챙겨 뿔뿔이 돌아가는 길은 그녀가 떠난 길과 정반대 편일까. 아니면 우리도 이미 가고 있는 것일까.

남쪽 바다 근처에는 동백이 피고 있다고 한다. 짙은 이파리 뒤에 숨어 제대로 익은 껍질을 까고 나오는 선홍빛, 오늘 아침은 툭툭 불거지는 꽃숭어리 터지는 소리가 들리듯 하다. 머지않아 우리는 바다 쪽으로 꽃놀이를 가고 저마다 얼굴이 불콰해지겠지. 동백은 피는 순간 질 때를 알고 있을까. 저토록 붉게 피는 걸 보면 영원할 것만 같은데, 그 영원 또한 한순간이어서 때가 되면 돌아가야겠지. 떨어진 붉디붉은 꽃송이 앞에서 애달파 하지만 어떻게 해 볼 수 없기에 우리는 기억이라는 나뭇가지에 흰빛을 걸어놓을 뿐이다. 그 빛이 동백꽃보다 더 붉어진다 해도, 우리의 가슴 한 편이 지는 꽃보다 먼저 뭉개진다 해도 따라가지 못할 빛이 있다. 그러기에 기별도 없이 우리에게 흰 그림자가 길게 들어서는 날을 위해, 풀 먹인 침구 한 벌을 언제라도 준비해 두라고 어느 시인은 말했던 것일까.

<시인>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