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병구의 서울생활, 어떻습니까?] 권오흠 신한카드 부사장

"늘 부족함 느껴 공부" 대기업 ★단 산골소년

권오흠 신한카드 부사장은 초교 5년 때까지 고무신을 신고 다니던 산골 소년에서 특유의 친화력과 성실성으로 단기간에 대기업 임원까지 오르는 등 승승장구했고, 고향에 대한 애착도 남달라 재경 달구벌포럼 창립 등 다양한 활동을 펴고 있다. 유광준 기자 june@msnet.co.kr
권오흠 신한카드 부사장은 초교 5년 때까지 고무신을 신고 다니던 산골 소년에서 특유의 친화력과 성실성으로 단기간에 대기업 임원까지 오르는 등 승승장구했고, 고향에 대한 애착도 남달라 재경 달구벌포럼 창립 등 다양한 활동을 펴고 있다. 유광준 기자 june@msnet.co.kr

권오흠(53) 신한카드 부사장은 1989년부터 지금까지 26년째 외길을 걷고 있는 카드업계 원조 1세대다.

예천 석송령 바로 윗동네에서 초등학교 때까지 고무신을 신고 다니던 산골 소년은 입사 20년도 채 안 돼 총무'인사'교육 등을 총괄하는 임원으로 발탁되는 등 승승장구해왔다. 산골, 지방대 출신으로 이른바 배경이 없었던 그가 국내 굴지의 카드회사에서 단기간에 임원에 올라 회사를 대표하는 자리에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늘 부족하다고 느끼며 배우는 자세'와 '특유의 친화력'이 바로 가장 큰 배경으로 작용했다.

권 부사장은 회사가 어려울 때 CEO와 노동조합 양쪽으로부터 인정받는 노사협력팀장이 됐다. 신생 LG카드에 입사해 LG카드가 신한그룹에 인수되고, 다시 신한카드와 합병될 때까지 꾸준히 한자리를 지키며 노사관계 조율, 합병 업무 등을 매끄럽게 처리했다. 친화력과 성실성으로 대기업 신입사원 100명 중 1명도 채 오르기 어렵다는 임원에, 그것도 9년째 롱런하며 경영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고무신 소년, 예천에서 안동으로

경북 예천군 감천면 진작리(진평3동). 권 부사장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운동화를, 중학교 3학년 때 전깃불을 처음 구경할 만큼 깊은 산골에서 3남 4녀의 셋째로 태어났다. 낮에는 고무신을 신고 뛰놀고, 밤에는 호롱불 밑에서 생활했다. 하지만 담배와 벼농사를 짓는 논밭이 30마지기(6천 평) 정도로, 시골치고는 형편이 꽤 괜찮은 편이었다.

그는 나면서부터 '효자'이자, '대통령'이었다.

그는 "할아버지가 독자로, 어머니가 위로 딸만 둘 낳는 바람에 친정에서 셋째인 나를 낳지 않았다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판이었다"고 말했다.

"어머니가 딸 둘 이후 남자 아이를 낳자, 할머니는 정초인 음력 1월 18일 밤 10시쯤 거름 무더기 위에서 '대통령 났다'고 고함을 치는 바람에 동네 사람들이 불이 난 줄 알고 물동이를 들고 뛰쳐나오는 등 난리가 났다고 합디다."

출산 에피소드를 들은 권 부사장의 어릴 적 꿈은 한동안 대통령이었다.

예천의 한 분교(덕률초등학교 분교인 삼천초교)에 다니던 그는 5학년 접어들면서 '큰물에서 놀기'(?)를 바랐던 부모님 뜻에 따라 한 학년에 14개 반이나 되는 안동 중앙초교로 전학했다.

안동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던 삼촌 집에 2년 동안 얹혀 지내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는 두 살 터울 동생과 힘겨운 자취생활을 시작했다. 농사일에 바쁜 부모님들이 아들 자취방을 자주 찾을 겨를은 없었다.

◆고시 실패, 대기업 카드사 외길로

권 부사장은 공무원이던 삼촌의 권유로 공직자의 길을 걷기 위해 대학에서 행정학을 전공했다.

부모님은 장남이 대구지역 대학에 입학하면서 전답을 모두 팔고 대구로 이사했다. 시골에서야 전답이 꽤 됐지만, 도시생활은 빠듯할 수밖에 없었다. 학창시절 공부에 소홀하다 뒤늦게 고시공부에 뛰어든 그는 졸업할 때쯤 군대에서 돈을 모아 공부를 계속할 요량으로 입대했다.

그는 "동생들도 대학에 진학하면서 집안에 기댈 수가 없었다"며 "군대 월급을 모아 행정고시 공부를 계속하려고 공군장교를 지원해 강릉으로 갔는데, 설악산과 해수욕장, 대관령 스키장을 거쳐 제대하니 돈을 모으기는커녕 빚만 조금 생겼더라"고 했다.

결국 대학 졸업 뒤 대기업인 럭키금성사에 입사했다. 전자나 화학 등 이름난 계열사보다는 새로운 도전에 대한 기대를 갖고 1989년 전해에 금성사가 인수한 LG카드에 입사했다. 카드사는 해마다 성장세를 지속했다. 하지만, 10여 년 만에 카드대란이 닥치면서 위기에 봉착했다.

그는 "1998년 말 IMF가 터지면서 카드사의 성장세는 더 가속화됐지만, 결국 부메랑이 돼 큰 위기로 돌아왔다"며 "부채비율이 높은 기업들이 잇따라 무너지면서 정부는 카드 사용을 통해 경기를 부양하려는 정책을 폈고, 처음엔 성공했다"고 설명했다.

결국 카드 발행을 남발하면서 삼성과 LG 등은 개인 카드사용 '한도 올리기'에 경쟁적으로 나섰고, 개인은 올라간 한도를 이용해 마구 써가며 '카드 돌려막기'를 되풀이하다 보니 한계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현재는 카드를 3개 이상 소지한 개인의 정보를 교류하지만, 예전엔 연체 정보 외에는 카드사 간 정보 교류가 없었다"며 "길거리에서 카드를 마구 발행하고 대학생 카드사용 한도가 2천만원까지 올라가면서 결국 2002년과 2003년 카드대란이 왔다"고 말했다.

◆위기에 빛난 친화력

LG카드도 카드대란의 후폭풍에 휘말리면서 불안감을 느낀 직원들이 2003년 노조를 만들었다. 권 부사장의 진가는 이때 드러났다.

"대구에서 채권지점장을 하고 있는데, 서울 본사에서 사장이 바로 올라오라고 하더군요. 구조조정 등 불안감이 퍼져 있을 때여서 마음 졸이며 올라갔는데, 사장이 '노조에 대응하는 노사협력팀장이 필요한데, 당신이 맡아보라'고 했어요."

그는 1년간 단체협약, 사규 등 노사관계 업무를 깔끔하게 마무리한 뒤 이듬해 전국 4개 본부 가운데 영남채권본부장에 올랐다.

정부는 카드사 부실 대책으로 해당 카드사 감자와 채권단 출자전환을 추진했다. 직원 2천800명인 LG카드는 출자전환한 채권단 중 신한은행에 인수됐고, 2007년 다시 직원 400여 명가량인 신한카드와 합병됐다. 그는 회사 위기를 친화력과 매끄러운 업무추진력으로 극복한 점을 높이 평가받아 합병과 함께 총무'인사'교육을 포괄하는 임원(HR본부장)에 발탁됐다.

그는 "2003년 노사협력팀장을 맡게 된 것이 당시 사장의 의중과 함께 노조위원장을 비롯한 후배들의 강력한 추천 덕분인 것을 뒤늦게 알게 됐다"며 "지금까지 가장 뿌듯하게 여기는 일"이라고 말했다.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하면서 배우고 공부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물론 자기 일은 당당하게 해야겠지요."

그는 "요즘 새내기 직장인들은 남의 눈치를 많이 보고, 승진만 빨리 하려고 하는 등 조급한 점이 눈에 띈다"며 "자기를 속일 수 없듯이 남들 눈치 보기보다는 자기 일에 당당하면 인정받고 성공할 수 있다"고 바람직한 샐러리맨상을 말했다. 또 "자기가 항상 많이 안다고 생각하면 누구한테서든지 배울 게 없지만,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겸손해지고 더 많이 배울 수 있다"고 조언했다.

김병구 기자 kb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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