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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의 사회학…SNS 시대, 그래도 낙서를 만날 수 있는 곳

북성로 공구골목의 한 카페에 있는 방명록 겸 낙서장. 낙서장 안은 자유롭다. 정해진 틀도, 순서도 없다. 줄, 칸, 심지어 위, 아래도 무시한 채 빼곡히 적힌 글에는 저마다의 추억이 녹아 있다. 김의정 기자
북성로 공구골목의 한 카페에 있는 방명록 겸 낙서장. 낙서장 안은 자유롭다. 정해진 틀도, 순서도 없다. 줄, 칸, 심지어 위, 아래도 무시한 채 빼곡히 적힌 글에는 저마다의 추억이 녹아 있다. 김의정 기자
동성로의 한 카페에는 손님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칠판 낙서장이 있다. 친구나 연인끼리 낙서를 남기거나 가끔은 혼자 와서 칠판을 이용해 공부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김의정 기자
동성로의 한 카페에는 손님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칠판 낙서장이 있다. 친구나 연인끼리 낙서를 남기거나 가끔은 혼자 와서 칠판을 이용해 공부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김의정 기자
동전노래방 안 낙서는 좀 더 과감하다. 낙서 하나가 벽 전체를 차지하거나 커플끼리의 진한 사랑표현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김의정 기자
동전노래방 안 낙서는 좀 더 과감하다. 낙서 하나가 벽 전체를 차지하거나 커플끼리의 진한 사랑표현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김의정 기자

국립국어원에서 제공하는 표준국어대사전에 '낙서'를 검색하면 3개의 뜻이 나온다. 첫 번째는 '글을 베낄 때 잘못하여 글자를 빠트리고 씀', 두 번째는 '글자, 그림 따위를 장난으로 아무 데나 함부로 씀. 또는 그 글자나 그림', 세 번째는 '시사나 인물에 관하여 풍자적으로 쓴 글이나 그림'이다. 여기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뜻은 두 번째 뜻이다.

'낙서'라는 말은 대개 중국의 '하도낙서'(河圖洛書)에서 온 것으로 아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이 말은 일본에서 만들어진 말이다. 일본에서는 중세시대부터 권력자에 대한 비판이나 사회에 대한 풍자를 종이에 적어 사람들의 통행이 많은 곳에 떨어뜨렸는데 이것을 '라쿠카키'(낙서), 또는 '오토시부미'(낙문)라고 했다.

요즘 한동안 사라지던 낙서가 다시 이슈가 되는 분위기다. 정치 상황을 비판하는 낙서들이 등장하는가 하면, 요즘 서점가에 유행하는 컬러링 북은 성인들에게 낙서의 욕구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한낱 '허튼짓'으로 취급받거나 심지어는 '범죄행위'로까지 여겨지던 낙서를 다시 보는 시선이 생긴 것이다.

이번 주 토요일 매일신문은 '낙서'를 이야기해보기로 했다. 대구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낙서부터 낙서가 주는 순기능과 역기능, 그리고 굳이 말리는데도 낙서를 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고찰해 봤다.

이화섭 기자 lhsskf@msnet.co.kr

카페에 남긴 추억 '나 여기 왔다 감'

◆추억을 남기는 낙서

예전보다 낙서가 많이 줄어들었다지만 여전히 낙서로 추억을 남기는 사람들이 많다. SNS 소통이 강화됐어도 손글씨로 자유롭게 남기는 발자취를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구시 중구 북성로 공구골목에 위치한 한 카페. 음료를 주문하는 곳 뒤편에는 손님들이 손글씨로 남긴 메모가 가득하다. 테이블 위에는 펜과 노트가 놓여 있다. 노트의 이름은 '방명록'이지만 사실상 친구 혹은 연인들과의 추억을 남기는 낙서장 역할을 한다.

낙서 대부분은 사랑에 관한 낙서다. 지난해 8월 한 남자 손님은 "여친 생기면 다시 와야겠다. 하… 그렇다"라고 썼고 그 아래는 답글 형식으로 "다시는 못 올 듯"이라는 낙서가 달렸다. 뒷장에는 솔로들의 아픔을 비웃기라도 하듯 "내 사랑 OOO이랑 대구 여행~ 다음에는 또 어디로 갈까?"라는 커플의 달콤한 낙서가 적혀 있다. 대구와 광주를 오가며 장거리 연애를 하는 연인의 낙서도 낙서장 한자리를 차지했다. "대구 남자, 광주 여자 벌써 육십구일이네. 시간이 놀랍네요. 오늘도 징징 받아줘서 고마워." 친구들끼리의 '살벌한' 우정도 엿볼 수 있다. "각서. 김OO, 나OO은 연봉 4천만원 이상의 직장에 취직하는 순간부터 성OO에게 세상에서 제일 비싼 양주를 대접할 것을 약속한다."

낙서장은 카페 사장 고원화(57) 씨가 2013년 3월 카페를 인수한 뒤부터 갖다놓은 것이 벌써 8권이 됐다. 고 씨는 "한 손님은 '매해 올 테니까 제발 낙서장을 버리지 말고 보관해 달라'고 부탁하고 종종 찾아와 지난 낙서들을 옛날 앨범 펼쳐 보듯 읽기도 한다"고 전했다.

낙서를 할 수 있는 곳은 이곳만이 아니다. 청소년들이 자주 가는 동전노래방에서도 낙서는 이어진다. 동전노래방은 노래방 기계에 500원짜리 동전을 넣으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곳으로 주로 10대 청소년들이 자주 찾는 놀이 공간이다. 대구 중구 동성로에 위치한 한 동전노래방에는 방마다 낙서들로 가득하다. 벽에는 '2013.10.13. OO랑 OO이 왔다감', '오OO♥김OO' 등 친구끼리, 연인끼리의 추억들로 채워져 있었다. 직원 안태용(20) 씨는 "예전에 비해서는 많이 준 편이지만 여전히 중'고등학생들이 오면 낙서를 남기고 간다"며 "낙서도 놀이의 일종이라 생각해서 말리지는 않는다"고 했다. 또 동성로의 한 2층짜리 카페에는 층마다 한쪽 벽면이 칠판으로 돼 있어 손님들이 낙서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이곳에서도 친구들끼리의 우정, 연인들 간의 사랑 남기기는 여전했다. "물고기, 돼지 남친 기원", "14년 10월 마지막 팅이♥탱이" .

◆사라진 낙서 어디로 갔나?

대학가는 오래전부터 낙서가 많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요즘은 낙서를 발견하기가 많이 어려워졌다. 20일 오전 대구 북구 경북대의 한 강의동을 찾은 기자는 1층부터 5층 강의실과 화장실에 낙서가 있는지 모두 확인했다. 낙서는 눈에 쉽게 띄지 않았다. 한 강의실 기둥 뒤에 커닝페이퍼로 의심되는 깨알 같은 글씨로 쓰인 영어와 그림이 그나마 눈에 들어왔다. 60개의 책상 중 한두 군데에 연필로 끄적인 낙서가 보였지만 대부분 깨끗했다. 화장실 안은 강의실보다 더 말끔했다. 가끔 동아리나 학회 홍보 안내문이 붙어 있었지만 직접 펜으로 쓴 낙서는 단 한 글자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 많던 강의실 낙서는 어디로 갔을까. 이에 대한 답은 수업 시간 학생들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지모(24'경영학과) 학생은 "수업시간에 낙서하는 애들은 거의 없다. 강의 중 딴 짓이라야 대부분 노트북이나 스마트폰으로 하는 실시간 채팅 정도"라고 설명했다. 수업 중, 대표적인 '딴 짓'이던 낙서가 스마트폰과 노트북에 자리를 내어준 것이다.

낙서를 대신하는 건 온라인 채팅뿐만이 아니다. 개인의 일상에서부터 정치풍자까지 다양한 메시지를 실시간 공유할 수 있는 SNS도 낙서를 대신한다. 페이스북, 트위터 등 대부분의 SNS에는 장문이 아닌 단문, 심지어 단어들의 나열이 짧은 시간 안에 쏟아져 올라온다. 직장인 김혜진(28) 씨는 "온라인에는 '배설한다'는 말을 쓸 정도로 글을 마구 뱉어내는 경향이 있는데 어릴 때 여기저기 낙서하던 것과 닮아 있다"고 말했다. 대학생 장수진(25) 씨는 "강의실이나 화장실 낙서는 일회용으로 끝나지만 온라인에 쓴 글에는 댓글이 달리거나 실시간 반응을 확인할 수 있으니까 더 재미있다"고 했다.

◆정치 비판, 풍자 소재로 이용되기도

낙서는 정치를 비꼬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지난해 12월 25일 밤 서울 명동 일대 건물과 바닥에 의미심장한 낙서가 등장했다. 신원 미상의 청년들이 스프레이 페인트를 이용해 'ㅈㅂㅇㄱㅎㅎ 나라 꼴이 엉망이다'라는 글귀를 명동 곳곳에 남긴 것이다. 글귀 중 'ㅈㅂㅇㄱㅎㅎ'는 국정개입 의혹을 받고 있는 정윤회와 박근혜 대통령의 이름 초성을 번갈아 쓴 것으로 알려졌다.

대구에서도 지난해 10월 말 동성로 일대에 정치를 풍자한 그라피티가 등장했다. 그라피티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닭을 합성한 모습이었다. 그림을 그린 미대생 A(22) 씨는 도시철도 반월당역과 대구백화점 앞 야외무대, 박근혜 대통령 생가터 표지판 등에 그라피티를 그렸다. 그림에는 닭 부리를 달고 있는 박 전 대통령의 모습이 있고, 아래에 'PAPA CHICKEN'(아빠 닭)이라는 글자가 쓰였다. 중구청은 하루 만에 이를 지웠고 중부서는 A씨를 조사한 뒤 공공조형물에 대한 재물 손괴 혐의를 적용했다.

글 사진 김의정 기자 ejkim90@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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