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중구 북성로 공구골목을 지나가다 보면 작은 주차장 벽면을 가득 메운 사슴 그림을 볼 수 있다. 달 위에 뿔이 아주 큰 사슴이 서 있고 그 뒤로 아름다운 빛깔의 선들이 지나고 있는 이 그림은 보는 이로 하여금 뭔가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내게 한다. 이 주차장 벽은 앞서 말한 사슴 그림뿐만 아니라 다양한 모양과 글자가 벽화로 그려져 있다. 대구 시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벽화들과 다르게 자유로움과 생동감이 뜨겁게 느껴지는 작품들이 많았다.
도대체 이런 자유롭고 생동감 넘치는 그림을 그린 이들은 누구일까? 기자가 수소문해본 결과, 사슴 그림은 대구에서 활동하는 한 그래피티 작가의 솜씨란다. 그를 만나봤다. 추위가 풀린 듯하던 이달 16일, 기계'공구 가게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어찌 보면 삭막해 보일 수 있는 북성로를 다채로운 색깔로 칠한 그래피티 작가 '팔로'(Pallo'27) 씨를 만났다. "본명을 밝히고 싶지 않다"는 팔로 씨의 뜻에 따라 이후 호칭을 계속 '팔로'로 쓰기로 했다.
◆신비로움을 보여주고 싶어 그린 사슴
팔로 씨에게 "많은 소재 중에 왜 하필 사슴이냐"고 물어봤다. 북성로와 사슴이 언뜻 연관성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사슴이요? 굳이 어떤 연관성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뭔가 신비로운 모습을 그려보고 싶었어요. 환상적인 모습, 그러니까 어떤 '환상'을 보여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런 작업을 한 거죠."
팔로 씨가 북성로에 그래피티를 하게 된 계기는 지난해 가을에 열린 워크숍 '거리에서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때문이었다. 그때 다른 스트리트 아트 작가들과 '거리에서 보여줄 수 있는 예술'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이에 북성로 신협과 북성로 건물주가 제공한 벽을 그래피티로 채우게 된 것이다. 팔로 씨가 참여한 작품은 앞서 말한 '달 위의 사슴' 그림과 'WONDERFUL'이라는 글자였다. 'WONDERFUL'을 그리게 된 이야기는 어찌 보면 살짝 허무하기까지 했다.
"저와 함께한 친구들이 작품을 다 하고 나니 벽 하나가 남는 거예요. 그래서 뭘 그릴까 고민을 잠깐 했죠. 그래서 '지금까지 이 벽에 해온 우리들의 작업에 대한 소감을 써보자'고 생각했죠. 글자를 찾다 보니 벽의 칸이 딱 아홉 글자가 들어갈 공간이더라고요. 그때 떠오른 글자가 바로 'WONDERFUL'이었어요. 그래서 바로 작업에 들어갔죠."
◆길이 곧 캔버스고 전시장
팔로 씨는 3년 전부터 대구에서 그래피티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 전에는 대학교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던 대학생이었다.
"군 전역을 한 이후에 진로를 많이 고민했어요. 전부터 계속 '그림을 그리면서 사는 삶'을 꿈꿔왔었거든요. 그 꿈을 이뤄야겠다는 결심이 선 후 대학을 중퇴하고 혼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그림'에 대한 열망으로 대학까지 중퇴하고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했다. 굳이 대학을 다니지 않기로 한 건 "충분히 혼자서도 그림을 그리면서 즐기고 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라 했다. 하지만 팔로 씨는 전시 공간조차 잡을 수 없었던 현실에 부딪히고 만다. 그래서 생각해 낸 곳이 바로 '사방에 널린' 벽이었다.
"그림을 그리면서 '내가 그린 그림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이야기하고 싶다'는 욕구가 굉장히 강했어요. 그런데 전시 공간을 못 잡아서 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리고 '많은 사람에게 내 그림을 보여주고 싶은데 왜 굳이 전시장만을 고집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벽'을 택했어요."
팔로 씨가 자주 그래피티로 표현하는 주제는 인간의 내면에 대한 생각들이다. 인간 안에 선과 악이 공존하는 모습을 표현한다거나 사람들이 숨기고 있는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한 이야기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걸 좋아한다. 팔로 씨의 그래피티 실력은 적어도 대구경북지역 안에서는 손꼽히는 수준이다. 북성로뿐만 아니라 동성로의 클럽 '쟁이 콜렉티브'에도 그의 그래피티 작품이 있고 때때로 대구경북지역의 외국인들이 여는 파티에 초대받아 그래피티 작업을 보여주는 퍼포먼스도 했다.
◆어둠과 밝음 사이에서
그래피티가 길거리에 그리는 그림이다 보니 너무 자유롭게 그리다 보면 건물주의 저항이나 경찰의 제지를 받기도 한다. '도시의 미관을 훼손하고 개인의 사유재산인 건물과 공공기물인 도로 등을 더럽힌다'는 이유에서다. 그래서 그래피티는 허락받지 않은 곳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팔로 씨도 경찰이나 건물주들과 일상적으로 갈등을 겪는다. 대구지역 그래피티 작가들에게 훌륭한 작업장(?)이 되고 있는 태평지하도 벽면에 그래피티를 그리다가 이를 본 경찰과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인 적도 있었다.
"사실, 그래피티가 반달리즘(문화'예술 및 공공시설을 파괴하는 행위 또는 그러한 경향)에서 비롯된 문화이다 보니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는 게 당연할 거예요. 저희들이 낙서한 그림을 지우는 것도 건물주 입장에서는 당연한 거고요. 그래도 그런 곳이 아니면 저와 같은 사람들은 우리들의 생각을 소리칠 곳이 없어요. 그것을 분출하기 위해 결국 다른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는 벽을 택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팔로 씨가 그래피티 작가로 활동하면서 가장 크게 걱정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자유롭게 그리지 못하는 상황이 오면 어쩌나' 하는 것이다.
"그래피티라는 게 항상 밝고 알록달록한 그림만 그리지는 못해요. 사람의 내면이 어두워질 때도 있잖아요. 그래서 그렇게 어두운 느낌을 살려 작업해 놓으면 '너무 침울한 느낌 아니냐'며 다시 그려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해요. 그럴 때는 고민이 되죠. 그래서 모든 작업에서 가장 우선하는 것이 바로 '내가 자유로운 주제로 그릴 수 있느냐'는 거예요."
요즘도 팔로 씨는 벽을 찾아다닌다. 더 자유롭게, 더 큰 그림을 그려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다.
"굳이 그래피티를 택한 이유를 말하자면, '재미있고 자유로워서'예요. 내 안의 많은 이야기들을 보여주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 거죠. 지금도 '어떻게 하면 더 잘 그릴까' '더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벽은 어디에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돌아다녀요."
대구시의 브랜드 슬로건은 '컬러풀 대구'(Colorful Daegu)다. "색채가 '다양한, 다채로움'을 의미해, 젊고, 밝고, 멋지고, 화려하고, 활기찬 도시 이미지를 제공해 다양한 모습의 발전적인 대구를 표현한다"고 대구시는 설명하고 있다. 팔로 씨가 그리는 그래피티를 '도시를 더럽히는 낙서'로 낙인찍는다면 '다양하고 다채로운' 대구를 어디서 볼 수 있을까. 쾌활한 스물일곱 살의 젊은이 팔로 씨는 어찌 보면 컬러풀한 대구를 만드는 사람 중 하나다. 그 컬러풀함은 북성로든, 태평지하도든, 아니면 동성로 클럽의 어느 벽면에서든 확인할 수 있다.
이화섭 기자 lhssk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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