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를 잘 활용하면 득이 된다. 무엇을 얻고자 한 것은 아니지만 빈 공간을 채우다 보면 어느 순간 머릿속이 정리되고 새로운 생각이 번뜩인다. 특히 청소년이나 어린이에게는 정서 발달을 위한 좋은 도구다. 하지만 환영받지 못한 곳의 낙서는 미관을 해치는 독이 되기도 한다. 낙서로 울고 웃은 사람들에게 낙서의 '좋은 예'와 '나쁜 예'를 들어봤다.
◆낙서로 세상 비틀기
사회에 불만이 많은 시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때가 고등학교 시절일 것이다. 입시에 대한 압박감을 낙서를 통해 건강한 웃음으로 발전시킨 고등학생들이 있다. 대구 도원고등학교 학생들은 지난해 10월 교내 낙서대회에서 저마다 방식으로 세상을 비틀어 보았다. "낙서 좀 해 오라"는 선생님의 주문에 학생들은 신나게 낙서를 했고 이 중 기발한 작품들은 '낙(서)장불입'이라는 책으로 탄생했다.
낙(서)장불입에 묶인 낙서들은 이런 식이다. '먹고 싶은 음식으로 식판 꾸미기', '시험지에 마음대로 문제를 출제하고 풀어보자' 등이다. 학생들이 그린 낙서 틀 위에 낙서장을 가진 사람이 상상력을 발휘해 채워 넣는 방식이다.
학생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그동안 억압됐던 스트레스를 낙서에 반영했다. 고은경(18) 양은 입술 모양을 가득 그린 낙서를 출품했다. 고 양은 "학교에서 얼마 전부터 틴트(입술에 색을 입히는 색조 화장품) 사용을 단속했는데 친구들끼리 낙서로라도 마음껏 입술에 색칠해보자는 의미에서 그려 냈다"고 말했다. 현실에 변화는 없지만 낙서를 할 때만은 행복한 상상에 젖을 수 있는 셈이다.
낙서는 새로운 놀이거리가 되기도 한다. 윤지민(18) 양은 "보통은 쉬는 시간에 스마트폰을 가지고 놀다 보면 전자파에 노출돼 쉽게 피곤해지는데 낙서장은 많이 해도 오히려 머리가 비워지는 것 같아 시간때우기 놀거리로 딱"이라고 말했다. 김효정(18) 양도 "학년이 올라갈수록 뭔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들지만 낙서는 아무 생각 없이 할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낙서대회를 주관한 인성인문사회부장 문웅열 국어교사는 낙서를 통해 의도치 않게 개발되는 '창의력'을 가장 큰 선물로 여겼다. 문 교사는 "낙서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세상을 비틀어보는 창의력이 개발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낙서는 아이 정서 발달에 도움이 됩니다"
낙서의 긍정적인 영향은 치유의 영역에서도 나타난다. 평소 아이들이 어떤 내용으로 낙서하는지 살펴보면 아이들의 일상생활은 물론 생각까지도 알 수 있다. 백중열 교수(대구교대 미술교육심리학)는 초등학생 저학년이 낙서처럼 그린 그림을 보여줬다. 그림 속에는 외계인이 여자들의 목을 줄로 묶어 끌고 가는 내용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백 교수는 "그림을 그린 아이는 '엄마가 수학 공부를 강요해서 너무 힘들다'고 하더라"고 했다. 한 마디로 그림 속 여자는 엄마를 상징하는 것이었고 수학의 굴레에서 탈피하고 싶은 게 아이의 낙서 그림에서 드러났다. 백 교수는 "이처럼 말로 표현되지 않는 것들이 일상적인 낙서에 드러나게 돼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낙서를 많이 한다고 무조건 심리가 불안하다고 해석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단순히 활발한 성격 때문에 산만해 보이는 아이와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를 앓는 아이의 낙서 형태는 다르기 때문이다. 아이의 낙서에서 사람이나 사물의 형태가 나오면 단순히 호기심이 많은 아이일 가능성이 있다. 이런 경우 아이의 낙서를 두고 아이와 감정을 공유하면서 아무 데나 낙서하는 행동을 고쳐나가면 된다. 반면 아이가 종이를 새카맣게 칠하는 것처럼 정확한 형태를 그리지 못한다면 정서적 불안을 의심해봐야 한다. 백 교수는 "이때도 조금만 관심을 가져주고 형태를 그릴 수 있도록 도와주면 정서적 안정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아동심리치료로 낙서가 각광받는 이유는 어린이들이 겪는 언어적 스트레스에서 찾을 수 있다. 요즘 아이들이 뭐든 논리적으로 말하기를 강요받는 가운데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개인의 감정은 평소 낙서나 그림 등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낙서로 치유의 긍정적인 효과를 얻으려면 그 방법을 선택할 때 신중해야 한다. 아이가 활동적인지, 소극적인지에 따라 심리치료 소재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백 교수는 "소극적인 아이에게 큰 붓을 주고 넓은 공간에 그림을 그려 보라고 하거나 물감을 마음대로 던져보라고 하는 것은 아이에게 더 큰 스트레스를 줄 수 있다"며 "작은 낙서라도 어떤 것을 그렸는지 물어보고 이를 보관, 전시하면서 자존감을 길러주는 게 좋다"고 말했다.
◆낙서로 골머리 앓는 사람들
낙서에는 순기능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공공장소나 개인 사유지에 무분별하게 그려진 낙서는 인상을 찌푸리게 한다. 21일 대구 중구 대봉동 김광석길. 관광객들 사이로 보이는 낙서들은 왠지 이들의 즐거운 시간을 방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창원에서 대구로 관광 온 장은빈(21) 씨는 "낙서가 없는 곳을 찾아 사진을 찍느라 애를 먹었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의 이름 옆에서 사진을 찍으려니 왠지 꺼려졌다"며 안타까워했다. 함께 온 이시원(21) 씨도 "전화기 부스에 있는 낙서는 전화하며 끼적인 것 같아 운치 있지만 전혀 연관성 없는 곳에 쓰인 낙서는 별로다"고 했다. 초등학생 딸을 데리고 놀러 온 주부 이모(40) 씨는 "딸이 낙서를 가리키며 '이거 뭐야?'라고 물어 순간 난처함을 숨길 수 없었다"며 "남이 그린 작품에 함부로 낙서한 것은 아이들 교육에도 좋지 않다"고 덧붙였다.
중구청은 지난해 10월부터 김광석길 낙서 관리에 들어갔지만 미관을 해치는 낙서는 여전히 골칫거리다. 중구청 관계자는 "낙서 공간을 따로 만들고 눈으로만 봐 달라는 안내표지판도 걸었지만 여전히 몇몇 사람들이 낙서를 멈추지 않아 관리자 입장에서는 힘든 게 사실"이라며 "작품 바깥 부분의 낙서는 지울 수라도 있지만 작품 위에 있는 낙서는 작가가 아니면 손대기 어려워 문제"라며 하소연했다.
개인의 사유지에 무단으로 그려진 낙서도 주인의 머리를 복잡하게 한다. 대구 중구 태평네거리 부근에는 눈에 띄는 그래피티가 있다. 지하차도에서 연결된 건물 벽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그림 네 개가 그려져 있다. 가까이 가서 보면 낙서 옆에는 "이곳은 사유재산이므로 모든 낙서를 없애고 원상복구를 바란다"는 건물주의 단호한 경고장이 붙어 있다. 건물주는 "지난해 11월 말에 주말을 보내고 나왔는데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예쁜 그림이면 가만히 두겠지만 흉물스러워 깜짝 놀랐다"며 "경찰에게 말해도 CCTV가 없어 찾기 어렵다고 해 매우 난처한 상황"이라고 하소연했다.
글 사진 김의정 기자 ejkim90@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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