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슬람 극단주의 광기 공포와 슬픔의 현장] <5>쿠르드여성민병대

여성 해방 외치는 5천 여전사, IS 진지 침투해 자살폭탄 "꽝"

쿠르드족 여성 전사들이 전투 참가를 앞두고 사격 훈련을 받고 있다.
쿠르드족 여성 전사들이 전투 참가를 앞두고 사격 훈련을 받고 있다.
시리아와 인접한 터키의 국경도시 수르츠에서 이슬람국가단(IS)의 공격에 희생된 쿠르드족 젊은이의 장례식 도중 유족이 오열하고 있다.
시리아와 인접한 터키의 국경도시 수르츠에서 이슬람국가단(IS)의 공격에 희생된 쿠르드족 젊은이의 장례식 도중 유족이 오열하고 있다.
시리아와 인접한 터키의 국경도시 수르츠에서 이슬람국가단(IS)의 공격에 희생된 쿠르드족 젊은이들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쿠르드족 지도자들과 쿠르드인들이 슬픔을 나누면서 IS에 대한 항전을 다짐하고 있다.
시리아와 인접한 터키의 국경도시 수르츠에서 이슬람국가단(IS)의 공격에 희생된 쿠르드족 젊은이들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쿠르드족 지도자들과 쿠르드인들이 슬픔을 나누면서 IS에 대한 항전을 다짐하고 있다.

시리아의 코바니 맞은편의 터키 국경도시 수르츠에는 코바니에서 넘어온 쿠르드 난민들로 북적댄다. 필자는 시의 중심가에서 만난 코바니 젊은이들에게 "여자들은 전부 코바니에서 싸우고 있는데 젊은 남자들이 여기서 뭘 하고 있나?"라고 질책한 적이 있다. 물론 이들은 학교 핑계나 가족 핑계를 대면서 변명을 해댔다. 사실 코바니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쿠르드 전사들은 여성들이 반 이상을 차지하는 걸로 알려져 있다. 여성들로 이뤄진 '쿠르드여성민병대'는 5천 명가량으로 추산되고 있다.

코바니에서 쿠르드 여성 전사로 이슬람국가단(IS)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는 예즈디 출신의 '로비온'(20)과 전화로 그녀의 사연을 들을 수 있었다. 작년 8월 초, 이라크 북부의 예즈디인들이 모여 사는 신자르 지역에 있는 그녀의 마을로 이슬람국가단이 공격해 온다는 정보를 미리 듣고서 그녀는 산으로 도망쳐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들과 다섯 명의 형제자매들은 가재도구를 챙기면서 지체하는 바람에 이슬람국가단의 포위망을 빠져나올 수 없었다고 한다. 산에서 가족들에게 전화하니 "이슬람국가단에 마을이 포위돼 빠져나갈 수 없다"고 했다. 다음 날 전화하니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며칠 후 마을 사람들 모두가 이슬람국가단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 뒤 그녀는 전사로 훈련을 받고 코바니로 자원해서 갔다. 가족들이 모두 살해당했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고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려 친구들에게 이를 감추려고 언제나 벽 뒤로 가서 혼자서 눈물을 닦았다는 것이다. 하루의 생활상을 물으니 전투는 주로 밤에 하고 낮에는 주로 2시간씩 교대로 잠을 잔다고 했다. 전투를 벌이면서 긴장된 생활을 하다 보니 이제는 가족을 잃은 슬픔에서 거의 벗어난 상태이며 이제는 가족의 복수보다는 이슬람 여성들의 해방을 위해 싸운다고 했다.

지난해 10월 초에는 쿠르드 여성전사 '아린 미르칸'이 폭탄을 메고 이슬람국가단의 진지 깊숙이 침투해 자살폭탄을 터뜨려 열두 명의 이슬람국가단원들을 살해하면서 쿠르드 여성의 용감성을 전 세계에 알렸다. 그녀의 자살폭탄 공격으로 인해 이슬람국가단은 한동안 두려움에 떨면서 진격을 멈추기도 했다.

필자는 이슬람국가단에 대항해 전투를 벌이다 숨진 쿠르드 여전사들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수르츠의 병원에는 벌써 수백 명의 애도 인파가 모여 있었고 세계 곳곳에서 온 언론인들이 장례식 표정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터키에 의해 인권이나 표현의 자유가 완전히 억압돼왔던 쿠르드인들에게 장례식 행사는 이들의 의사를 마음껏 표출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고 수르츠의 쿠르드 변호사 바란이 강조했다. 지난해 9월 중순경, 코바니에 이슬람국가단이 침공한 이래로 코바니와 마주한 쿠르드 도시 수르츠에서는 한 주에 한 번꼴로 장례식이 치러져 왔다. 이날은 코바니에서 목숨을 잃은 예페게(YPJ'코바니여성민병대)에 소속된 네 명의 여성 게릴라 장례식이 열렸다.

이슬람국가단에 맞서 싸우다 숨진 네 명의 여성 쿠르드 게릴라 이름은 미스테파 미헤메드, 아지트 아피, 비얀 아흐메드, 미즈긴 아흐메드이다. 이날의 장례식에는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수천 명의 쿠르드인과 지역 대부분의 쿠르드당 지도자들, 정치인들이 대거 참석했다. 대규모 인파들은 수르츠시립병원에서 공동묘지까지 2㎞ 남짓한 거리를 행진해갔다. 관을 들고 가장 앞에서 시위대를 이끌던 행렬들은 "쿠르드민족 만세!"를 외치거나 "쿠르디스탄(쿠르드 땅)은 이쉬드(이슬람국가단)의 무덤이 되리라!"는 구호나 "예페게의 저항운동 만세!"를 외치면서 행진해 나갔다.

공동묘지에 네 개의 관이 도착하자 1분간의 묵념을 시작으로 장례식이 시작됐다. 곧이어 이슬람 지도자들의 기도가 끝나자마자 파놓은 묘지 자리로 관이 옮겨졌고 관은 흙으로 덮였다. 공동묘지에는 이슬람국가단에 맞서 코바니에서 전투를 벌이다 앞서 숨져간 수십 명의 쿠르드 전사들의 묘비명이 보였다. 많은 쿠르드인의 눈가에는 눈물이 얼룩졌고 쿠르드 여인들이 모인 곳에서는 죽은 전사의 어머니가 울다가 정신을 잃는 일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네 구의 시신이 모두 안장되면서 마지막 가는 길을 비는 행사가 시작됐다. 참석한 쿠르드인들이 모두 두 손을 들고서 두 손가락으로 승리의 V 자 사인을 만들면서 큰 함성을 질렀다. 하지만, 이들의 함성은 기쁨과 환희의 함성이 아니라 슬픔을 내쫓기 위한 주술과도 같은 함성이었다. 함성을 지르는 중에도 많은 쿠르드인의 뺨으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라 없는 민족의 설움을 장례식에서 더 크게 느꼈는지 "쿠르디스탄 만세!"를 외치면서 장례식을 마쳤다.

장례식이 끝났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돌아가지 않고 삼삼오오 모여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 계속 필자의 눈에서 떠나지 않던 일가족이 있었다. 어린 아이들과 함께 장례식 내내 무덤 앞에 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쿠르드 여인의 모습이 계속 눈에 띄었다. 필자는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묘비명에는 '레나스 케르멕스'라는 라틴 문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고 주위에는 네 명의 어린 아이들과 두 명의 10대 여학생이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와 함께 앉아있었다. 필자는 아이들의 아버지와 대화하기 위해 아버지를 찾았다. 곧 무덤에 잠들어 있는 젊은이의 아버지가 다리를 절면서 필자에게로 왔다. 동행한 그의 동생이 가족들을 소개해줬다.

모두 코바니 출신으로 무덤에 잠든 젊은이는 18세의 젊은이였으며 '무하마드 케르멕스'의 아들이라고 했다. 레나스가 이슬람국가단이 쏜 로켓탄에 맞아 유명을 달리하던 날, 아버지인 '무하마드'도 다리에 두 발의 총상을 당해 의식을 잃고 수르츠로 실려 나온 일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물론 총상으로 의식을 잃은 아버지는 아들이 숨진 사실도 몰랐고 며칠 뒤 깨어나서야 아들의 소식을 들었지만 장례식에는 물론 참석하지 못했다고 한다. "인류의 적인 이슬람국가단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나의 아들은 쿠르드 민족의 자랑스러운 아들이다. 겨우 열여덟 살이었지만 항상 이슬람국가단에 맞서 싸울 각오를 다졌다. 그리고 학교에서 공부도 아주 잘했던 소년이다. 지금도 나의 아들만 생각하면 당장 코바니의 전투지로 달려가고 싶을 뿐이다." 그는 아들에 대해 말하는 도중 눈물로 인해 말문이 막혀 겨우 말을 이어나갔다. 계속 아들의 묘석을 잡고서 눈물만 흘리는 어머니와는 대화가 완전히 불가능했다.

장례식이 끝나고 돌아가면서 왼편으로 눈을 돌리니 서쪽 하늘에는 아름다운 노을이 붉게 지면서 해가 지고 있었다. 다시 이슬람국가단에 대한 미군의 공습이 시작됐는지 코바니에서는 폭연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슬람국가단과의 전투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연일 계속되고 있고 수르츠시립병원으로 향하는 죽은 전사들과 부상자들을 실어 나르는 구급차 소리는 끊이지 않고 있다.

하영식 객원기자(국제분쟁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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