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정달해의 엔터 인사이트] 황정민, 연기는 내 운명

아부지예∼ 이만하면 연기 잘 했지예∼ 근데 진짜 내 노력했어예∼

황정민은 2015년의 문을 가장 멋들어지게 열어젖힌 배우다. 지난해 말 개봉된 영화 '국제시장'의 '대박' 흥행이 새해 초로 이어져 결국 누적관객 수 1천200만 명(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을 넘어섰다. 황정민은 '국제시장'의 흥행 성공과 함께 '천만 배우'라는 타이틀을 가지게 됐다.

지난해 촬영을 마친 류승완 감독의 '베테랑', 그리고 나홍진 감독의 신작 '곡성'도 황정민이 주연을 맡은 작품이다. 두 편 모두 스타 감독들이 메가폰을 잡은 기대작으로, 올해 개봉 시기를 조율 중이다. 현재 황정민은 '국제시장'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새 영화 '히말라야' 촬영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히말라야'가 끝나면 강동원과 함께 '검사외전'의 촬영에 합류한다. 2015년뿐 아니라 내년까지 극장가를 흔들 만한 기대작을 이미 선점했다.

◆배우가 직업이니 열심히 연기하는 게 당연

2013년, 송강호가 '관상' '설국열차' '변호인' 등 빅 히트작 세 편을 차례로 내놓으며 한 해를 접수했던 적이 있다. 같은 해에 설경구도 '소원' '스파이' '감시자들'을 잇달아 내놓으며 화제가 됐다.

관객 입장에서야 '믿고 보는 배우'들의 신작을 자주 만날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 하지만, 송강호'설경구'최민식 등 'A급 배우'들이 다작을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충무로 '섭외 1순위'라고 불릴 만큼 출연 제안이 줄을 잇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좋은 작품'을 '좋은 시기'에 만나는 게 쉽지 않다. 또 본인이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연기인지 어울리지 않는 캐릭터는 아닌지 신중하게 살펴봐야 할 부분도 많다. 매 작품에 공을 들이는 만큼 촬영을 마친 후 체력 소모도 상당하다.

더구나 30대 하정우도 관계자들이 "대단하다"며 혀를 내두르고 있는데 40대 중후반의 배우들에게 '팬들을 위해서', 또는 '열정'을 명목으로 다작을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소위 '급'이 다른 이 배우들의 '클래스'에서 유독 '다작 행보'를 이어가는 배우가 있다. 바로 황정민이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국제시장'을 포함해 올해 관객과 만나거나 개봉 예정인 작품만 세 편이다. 송강호와 설경구가 그랬던 것처럼 꾸준히, 열심히 작업한 작품의 개봉 시기가 우연히 맞아떨어진 게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하지만 황정민은 좀 다르다. 2013년에도 '남자가 사랑할 때' '끝과 시작' 등 두 편을 선보였고, 2012년에는 '전설의 주먹' '신세계' '댄싱퀸' 등 세 편의 영화와 드라마 '한반도'를 소화했다. 그보다 앞서 2010년에도 '부당거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등 두 편의 주연작을 내놓고 '평양성'에 우정 출연했다. 2007년 역시 '열한 번째 엄마' '행복' '검은 집' 등 세 편을, 2005년에는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너는 내 운명' '천군' '달콤한 인생' '여자, 정혜' 등 다섯 편을 내놨다. 영화나 드라마 촬영이 없는 시기에는 연극이나 뮤지컬 무대에 오른다. 2012년 말부터 2013년 초까지 공연이 이어진 '어쌔신', 같은 해에 막을 올린 '맨 오브 라만차' 등에도 출연했다. 이 정도면 '습관성 다작'이다.

왜 그렇게까지 열심히 일을 하는지 궁금해 직접 물어봤다. "끊임없이 연기만 하며 사는 이유가 뭡니까?"

황정민이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어 보이며 답했다. "저는 직업이 배우라 열심히 연기를 합니다. 배우라는 타이틀을 가진 사람으로서 때로는 예술을 한다는 심정으로 작업에 매진하기도 하지만 광대로서 관객에게 즐거움을 줘야 한다는 의무감도 가지고 있어요. 꾸준히 연기하며 많은 작품을 관객 앞에 내놓은 후 선택하게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배우가 직업이니까 연기만 하며 사는 게 이상한 건 아니잖아요. 당연한 거죠."

◆'신세계'로 되찾은 전성기, 2015년에도 상승세

사실 내놓는 작품의 숫자만큼이나 황정민의 흥행 운이 뒷받침됐던 건 아니다. 전반적으로 '성공'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관객을 모으거나 작품성으로 극찬받았던 영화가 많았던 건 사실. 하지만, '국제시장'이 나오기 전에는 누적관객 수 500만 명을 넘긴 '대박 히트작'은 없었다. '국제시장'의 1천200만 관객 동원은 그만큼 황정민에게도 또 다른 터닝포인트가 될 만한 사건이다.

황정민이 대중에게 각인되기 시작한 건 2003년 작 '바람난 가족'에서 문소리의 남편 주영작 캐릭터를 맡으면서부터다. 앞서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와 '로드무비'(2002)로 끌어낸 호평에 힘입어 충무로 관계자들과 영화팬들에게 존재감을 알렸고 '바람난 가족'을 통해 대중적으로도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었다. '로드무비'에서 성적 소수자 대식 역을 맡아 보여준 거칠면서도 깊은 호흡, '와이키키 브라더스'와 '바람난 가족'을 통해 소탈하고 리얼한 생활연기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며 '연기파'라는 수식어를 가지게 됐다.

이후 2005년 '달콤한 인생'에서 보여준 백사장이란 캐릭터는 황정민의 연기 인생에 첫 번째 전환점이 됐다. 조직폭력배들의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양아치'로 비열하고 잔인한 인물을 현실감 있게 표현해 극찬을 들었다.

같은 해 개봉된 '너는 내 운명'은 황정민의 연기 인생에 첫 번째 전성기를 가져다줬다. 후천성면역결핍증에 걸린 티켓다방 출신 여성과 애틋하게 사랑을 나누는 시골 노총각 석중 역으로 절절한 감동을 자아냈다. 이 작품으로 황정민은 제26회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을 거머쥐며 그 유명한 '잘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어놓은 것뿐'이라는 소감을 남겼다. "저는 일개 배우 나부랭이라고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왜나면 60여 명이나 되는 스태프들이 멋진 밥상을 차려놔요. 그러면 저는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되거든요. 그런데 스포트라이트는 제가 다 받아서 너무 죄송스러워요."

이후로도 황정민의 '치열한 연기 인생'은 변하지 않았다. 스크린과 안방극장, 무대를 오가며 열심히도 연기했고 매 작품마다 '역시 황정민'이란 말을 들었다. 단, 2005년 이후 내로라하는 화제작이 뜸했던 탓에 시상대에 오르는 모습을 볼 수 없었고 '흥행 배우'라는 수식어와도 멀어지는 듯했다. 심지어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모비딕' 등의 작품은 호평을 듣고도 흥행에 참패해 아쉬움을 남겼다. TV조선에서 블록버스터라고 홍보했던 드라마 '한반도'에 출연했다가 시청자들의 외면 속에 조기 종영되는 굴욕을 맛보기도 했다.

이후, 다행히도 2012년 개봉된 '신세계'가 468만 명을 모으며 크게 화제가 되면서 황정민도 부활했다. 영화 자체의 완성도와 최민식'이정재 등 배우들의 열연도 좋았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눈부셨던 존재는 단연 황정민이었다. '달콤한 인생'의 백사장을 떠올리게 만드는 건달 캐릭터에 인간미와 해학을 더해 '황정민표 양아치 연기'에 정점을 찍었다. 이때부터 그리기 시작한 상승 곡선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다.

촬영이 진행되는 현장에서 황정민은 '주연배우 이상의 것'들을 소화한다. 끊임없이 감독과 대화하며 한 신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후배 연기자들이 상담을 해올 때면 거침없이 연기 선생님으로 나서 '한 수'를 가르쳐준다. 캐릭터의 의상과 소품도 일일이 챙긴다. 몸에 걸치는 옷 하나만으로도 캐릭터의 성격이 드러나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는 설명. 때로는 이 꼼꼼함과 열정 때문에 '지나친 게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한 차례 황정민과 호흡을 맞춰본 뒤에는 달리 말한다. 저 사람, '진짜 배우'라고….

정달해(대중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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