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계의 창] 바나나의 반전

미얀마 바간으로 향하는 뱃길 위에는 아낙들의 바나나 파는 소리 시끌벅적

1967년 경북 포항 출생. 경북대 정치외교학과 석사
1967년 경북 포항 출생. 경북대 정치외교학과 석사'박사. 중국 사회과학원 법학연구소 박사후과정

돈도 받지 않고 외국인에 던진 바나나 식민제국 노란머리 원숭이에 던진 경고

새벽 배는 맛이 좋다. 어둠 속에 피어나는 여명을 베어 먹는 맛도 일품이지만 싱그러운 공기를 허파꽈리 가득 채울 수 있는 특권도 있다. 무간지옥 같던 암갈색 강물이 빛을 받아 비단 금침으로 변하는 모습은 필설로 형언하기 어려운 경이로움이다. 감히 인간이 흉내 낼 수 없는 장엄함과 기품에 숙연해진다. 그래서 새벽에 배를 타고 길을 떠나는 맛은 일품이다.

미얀마 북부 도시 만달레이에서 불탑의 도시 바간으로 열린 뱃길은 그 묘미를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만달레이에서 승선하여 미얀마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아예야르와디강(Ayeyarwady River)을 타고 흐르다 보면 친드윈강(Chindwin River)과 합류되어 바간에 이른다. 꼬박 하루가 걸리는 긴 여정이지만 은둔의 왕국 미얀마의 속살을 비집는 재미를 생각하면 충분히 남는 장사이다.

새벽 6시 무렵, 어둠이 걷히면서 강은 분주해진다. 배를 타는 사람들이 속속들이 강둑에 도착하고, 짐꾼들의 움직임이 바빠진다. 크루즈여행을 상상하고 있던 초보 여행자들은 황당한 상황에 당황한다. 근사한 항만 시설은 고사하고 변변한 선착장조차 없다. 무거운 짐을 든 채 모래 언덕을 넘어 강변에 정박해 있는 배에 올라야 할 판이다. 그러나 걱정은 순간이다. 마치 매가 병아리를 낚아채듯 일단의 짐꾼이 나타나 가방을 채 간다. 현대식 물류운송회사처럼 조직이 체계적이다. 한 팀이 고객을 확보하여 물표를 붙이면 나머지 팀은 짐을 배까지 나른다. 복잡한 절차도, 번거로운 일도 없이 물 흐르듯 순조롭다.

승선을 마친 배가 뱃고동을 울리며 발진한다. 용솟음치는 해가 하늘을 갈라 아침을 열자 골재를 실은 바지선이 유유자적 지나간다. 햇살에 잠이 깬 선박들의 모습은 다채롭고 이채롭다. 고기잡이 나룻배에서부터 거대한 화물선까지 각양각색이다. 강은 힘차고 풍성하다. 조잡하고 불편한 항구에서 비롯된 오해는 잠시의 착각이었다. 인간이 만든 구조물이 아무리 근사하더라도 초라하기는 오십보백보이다.

강을 따라 흐르던 배가 간간이 강나루에 기댄다. 객이 타고 내리거나 물건을 하역하기 위해서이다. 때를 맞추어 원주민들이 달려와 객을 반긴다. 양손에 굵직한 바나나 송이를 든 아낙들, "투 싸우전, 투 싸우전"을 외치며 배를 향해 구애한다. 바나나 한 송이에 2천잣(2천원), 승선한 승객이 먼저 돈을 던지면 바나나 송이를 배로 던지는 방식으로 거래가 이루어진다. 배에 탄 관광객들이 뱃전으로 몰려나오고 앞다투어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자유분방한 옷차림과 형형색색의 피부 빛깔 사람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신기하고 즐겁다. 배 안에서 누군가가 돈을 던지자 한 아낙이 물로 뛰어든다. 물에 떨어진 돈을 건진 아낙이 배를 향해 바나나 송이를 휙 던진다. 바나나가 배 위로 떨어지자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나이스 피치!"

한동안 돈을 던지고 바나나를 받는 게임에 열중하던 사람들이 배가 선착장에서 빠져나오려고 방향을 틀자 고개를 돌린다. 안달 난 아낙들은 악착같다. 배를 따라 깊은 강물로 뛰어든다. 지켜보던 관광객 중의 하나가 불쌍해하며 돈을 던지자 아낙이 바나나를 던진다. 그런데 아, 거리가 너무 멀다. 던진 바나나가 배에 미치지 못하고 뱃전에 부딪혀 강물에 떨어진다. 땅에서 지켜보던 아이들이 발을 구르며 고함친다. 아낙이 다시 한 번 바나나 투척을 시도한다. 물살을 가르고 힘차게 헤엄을 치더니만 배 근처까지 가서 바나나를 던진다. 배 난간에 있던 사람이 아슬아슬하게 바나나를 받자 사람들의 환호성이 터진다. 아낙도 꽤나 고집스럽다. 돈은 이미 받았고 배는 떠나면 그만인데 굳이 바나나를 준다.

드디어 배가 멀어지고 더 이상 바나나 거래가 불가능한 상황이 되자 배에 탄 이와 지켜보던 원주민들 모두 정답게 손을 흔들며 이별한다. 그때, 미친 듯이 헤엄치며 바나나를 팔던 아낙이 바나나 한 개를 뜯어서 배를 향해 던진다. 배에 탄 사람들이 난리가 났다. 바나나를 받은 승객이 전리품을 높이 치켜들며 개선장군처럼 소리친다. "나이스 캐치!" 신이 났다. 연방 셔터를 눌러대고 하이파이브를 하며 즐겁다.

언덕 위의 원주민들도 즐겁다. 바나나 송구에 성공한 아낙이 뭐라고 하자 둘러싼 사람들이 포복절도한다. 아이들도 박장대소하며 깔깔댄다. 아낙이 던진 바나나 1구는 식민제국의 머리 노란 원숭이들에게 준 자비의 선물이다. 과거의 통한과 현재의 음욕을 바나나 하나로 경고하는 미얀마 아낙의 여유와 재치가 부럽다. 굿 샷! 미얀마!

이정태/경북대 교수·정치외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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