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불관용을 관용하지 않을 권리

프랑스 풍자 전문잡지 샤를리 에브도 테러사건 직후 세계의 반응은 '나도 샤를리다'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샤를리가 아니다'는 구호가 등장했다. 이슬람 모욕은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급기야 테러는 이슬람 조롱과 모욕이 자초한 '하라키리'(割腹)라는 비판까지 나왔다. 테러의 책임은 근원적으로 샤를리 에브도에 있다는 얘기다. 이에 따른 비난을 피하려고 '나는 샤를리가 아니다' 진영은 '테러는 용서할 수 없는 범죄지만'이란 전제를 깐다. 그야말로 '피음사둔'(言+皮淫邪遁, 번드르르한 말)이다.

이슬람과 그 종조(宗祖) 무함마드의 신성불가침은 이슬람 신정(神政) 체제에서는 자명한 가치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아니다. 대혁명 이후 프랑스에서 신성한 것은 없었다. 그래서 샤를리 에브도의 이슬람 풍자가 테러를 자초했다는 논리가 정당성을 가지려면 샤를리 에브도가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침묵했어야 한다. 하지만 이 잡지는 이슬람뿐만 아니라 유대교와 교황도 풍자했다. 결국 샤를리 에브도, 나아가 프랑스에 이슬람은 불가침을 인정할 수 없는 신성한 모든 것 중의 하나일 뿐이다.

이슬람에 대한 풍자가 아니라 조롱과 모욕이라는 소리도 납득하기 어렵다. 어떤 것이 풍자이고 어떤 것이 조롱이며 모욕일까. 풍자는 그 본질상 조롱과 모욕이다. 조롱과 모욕이 빠진 풍자는 풍자가 아니다. 특히 풍자 대상을 압축적이고 상징적으로 묘사해야 하는 만화는 조롱과 모욕의 채도(彩度)가 더 짙을 수밖에 없다. 이를 허용치 않겠다는 것은 프랑스와 근대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가치에 대한 부정이다. 그래서 의문은 결국 '톨레랑스'(관용)의 한계로 귀착된다. '민주주의의 가치를 부정하는 세력까지 관용해야 하는가'라는.

관용은 필요하다. 그 이유를 계몽주의자 볼테르는 이렇게 말한다. "관용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천부적 속성이다. 우리는 모두 약하고 오류를 범한다. 우리 모두 서로 우둔함을 용서하자. 그것이 첫 번째 자연법이다." 내가 옳다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나와 다름을 인정하고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관용은 무제한이어야 하는가. 볼테르의 대답은 '아니오'다. 관용을 불관용 하는 행동에 대해서는 관용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철학자 칼 포퍼는 이를 더욱 분명하게 말했다. "아무 제약 없는 관용은 반드시 관용의 소멸을 불러온다. 관용을 위협하는 자들에게까지 무제한의 관용을 베푼다면, 그리고 불관용의 습격으로부터 관용적인 사회를 방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관용적인 사회와 관용 정신 그 자체가 함께 파괴당하고 말 것이다…그러므로 우리는 관용의 이름으로 불관용을 관용하지 않을 권리(the right not to tolerate intolerant)를 천명해야 한다." 포퍼는 그렇게 하지 않은 비극적인 결과로 히틀러를 관용해 조기 사망한 바이마르 공화국을 꼽는다.

볼테르와 포퍼의 이런 경고는 우리에게도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우리 사회는 북한을 추종하고 대한민국을 부정해온 이석기 일당을 '다양성'과 '정치적 자유'라는 이름으로 관용해왔다. 그 결과 '종북=진보'라는 해괴한 논리가 진실처럼 통용되는 이념적 혼돈이 위험 수위에 이르게 됐고, 마침내 종북 집단이 버젓이 국회로 진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는 자유를 파괴할 자유를 용인했다는 점에서 관용의 과잉이자 민주주의의 자해(自害)이다.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의 급브레이크로 우리의 민주주의는 벼랑에서 떨어질 위기에서 일단은 벗어났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안심할 수 있을까. 불행하게도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종북을 진보로 착각하는 사이비 진보들의 준동은 여전하고 그들의 허울 좋은 '다양성' 논리는 여전히 관용을 들먹이며 '인정(認定)투쟁'을 벌이고 있다. 그래서 헌재와 대법원의 판결로 우리 사회의 이념적 정화(淨化)가 이뤄졌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관용하되 그 한계를 분명히 긋는 관용의 절제는 앞으로 더욱 견고히 지켜가야 할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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