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모레면 입춘이다

★권영시
★권영시

남쪽 지방에서는 벌써 납매(臘梅)가 노랑꽃을 피워 봄소식을 전한다. 매년 입춘을 앞두고 꽃피웠는데, 올해는 보름 이상 앞당겨 피웠다는 것. 어쨌든 24절기를 잊지 않은 셈이다. 이참에 누구보다도 빨리 움트는 귀룽나무를 찾아가 봤다. 길섶의 남천은 이파리가 검붉고, 황매화는 줄기가 습성이듯 여름처럼 푸르다. 어느 교회의 꽃댕강나무와 목서는 12월 초까지 꽃피웠는데, 지금 덕지덕지 말라붙은 꽃은 보기 흉해도 이파리만은 유난히 반질거린다. 검붉고 반질거리는 이파리나 푸른 줄기는 모두 혹한을 이겨내는 그들만의 비법이리라.

태조 왕건의 피신 길 저편 음지 쪽은 아직도 빙벽이다. 하지만 누가 아침 일찍 봄을 포획하러 나왔나? 반바지 차림에 급히 내려오는 두 청년은 미국인이었다. 어떤 사람은 갈지(之)자로, 또 어떤 이는 왜 자꾸만 거꾸로 내려오는지 역주행은 늘 불안하다. 거대한 망원렌즈 장착하고 내 뒤를 잇던 그분은 내가 한 컷 하는데 곧장 뒤따라 한 컷 했단다. 정녕 봄은 오고 있는 모양이다.

숲 속으로 들어갔다. 상수리나무가 세상을 등진 지 이미 오래돼 썩어가고, 그 밑동에서 구름버섯 아닌 영지가 빼곡하게 터를 잡았다. 한참 올라가서 목적지에 닿았다. 납매에 비하면 뒤지지만 이곳에는 봄을 이끄는 큼직한 귀룽나무가 서 있다. 이미 수명을 다해 썩어가는 나무의 크고 작은 둥근 구멍을 보아하니 죽은 몸 한 번 더 죽인 범인은 큰오색딱따구리였다.

이곳의 귀룽나무도 봄을 맞이할 텐데, 하기야 작년에도 입춘을 넘어섰으니 내가 조금 일찍 서둘렀나 보다. 작년 그때였다. 온 세상은 곤하게 깊은 잠에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귀룽나무만큼은 온몸이 근질근질했을까, 동아(冬芽)를 밀쳤다. 밤새도록 눈 내린 날도 먼동이 트자 뽀드득뽀드득 앞산을 밟아 올라봤다. 그날도 가만히 있질 않았다. 몸통에서 어김없이 따뜻한 온기가 흘렀고, 신초의 힘으로 두텁게 쌓인 흰 눈을 살살 녹였다. 곧이어 조롱조롱 매달린 영롱한 물방울은 마치 보석의 화려한 빛을 반사하는 프리즘 같았다.

훗날도 멈추지 않고 속도를 체크했다. 새순마다 하루에 몇㎜씩 밀치는 소리 얼마나 시끄러웠으면 이웃한 도토리가 눈(雪)을 헤집고 껍데기 박찼을까, 홀라당 벗은 속살도 보였다. 뒷날 발부리 뻗어 떡잎 솟구치자 산비탈이 웅성거렸다. 무심코 밟았던 낙엽과 그 두텁던 하얀 눈을 헤치고 노루귀가 법석을 떤 게 아닌가. 노루귀 연분홍·진홍·하얀꽃에 키다리·난쟁이까지 귓가의 솜털이 앙증맞았다. 생강나무 덩달아 노랑꽃 피운 그날이 봄이었고, 귀룽나무는 위대한 첨병이었다. 모레가 입춘이다. 곧이어 도토리와 노루귀를 동원할 게다. 이를테면 우리도 새벽종을 울리자.

<시인·전 대구시앞산공원관리사무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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