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병준의 대담] 박세일 교수

"다들 자기 몫 챙기느라 야단법석…국정, 산으로 갈수 밖에"

박세일 교수, 그는 그 나름의 꿈과 계획을 가지고 있다. 대한민국이 선진화와 통일이라는 큰 산을 넘어 세계의 중심에 서는 일이다. 오랜 시간 그는 이 꿈과 계획을 위해 살아왔다.

그 때문일까?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는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그를 청와대 수석에 임명했고, 박근혜 대통령은 당대표 시절 그를 정책위 의장으로 영입했다. 그가 같이 일하고 싶은 상당수 지식인들에게 비례대표 의석을 주면서까지 그렇게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그를 불러들이고 싶어 했다. 뜻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많은 영감을 얻었다. 바로 이 대담을 진행하는 김병준이 그 메신저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들의 이러한 관심에도 불구하고 그에 있어 현실정치는 언제나 높은 벽이었다. 그의 꿈과 계획을 펼쳐기에는 너무 난삽했다. 결국 그가 직접 '국민생각'을 창당하기도 했다. 지식과 경험을 가진 양심세력이 독자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이 순수한 열정 역시 현실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의 꿈은 여전히 뜨겁다. 그를 둘러싼 정치권의 논쟁 또한 뜨겁다. 이런 그와 함께 세상이 왜 이리 어지러운지, 또 길은 없는지 이야기를 나누어 본다.

◆어지러운 세상, 흔들리는 공동체

김: 세상이 어지럽다. 다들 자기 몫을 챙기느라 야단인데 국가는 맥을 못 추고 있다. 중재역할도 통합역할도 못하고 있다.

박: 대기업과 언론에 또 각종 이익집단에 국가가 밀리고 있다. 여기에 대통령 또한 제왕적 국회에 밀리고 있다. 민주화도 좋고 분산도 분권도 좋다. 그러나 국가를 전략적으로 운영할 만큼의 국가권력의 집중은 필요한데, 최고의 국가권력조차 해체되어 중심을 잃을까 걱정이다.

김: 왜 이렇게 되었나?

박: 산업화 과정에서 대기업 중심의 독과점 구조와 '관피아' '법피아'와 같은 특권적 유착 구조가 생겼다. 그런데 이게 해체되지 않은 채 민주화가 되었다. 그리고 이 민주화 또한 지도자를 투표로 뽑기만 하는 선거민주주의로서의 민주화가 중심이었다. 민주화도 선거 포퓰리즘으로 변질되기 쉬운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김: 정말 선거만 해 온 것 같다. 잘못된 구도는 그대로 두고.

박: 이 둘, 즉 독과점 구조와 특권적 유착 구조에 각종 이익집단의 목소리와 선거 포퓰리즘이 결합되는 상황을 상상해 보라. 국정은 산으로 갈 수밖에 없다. 선비정신 등 지도자들의 동양적 정신문화와 전통이라도 살아 있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다. 서구적 모델이 강조되는 것은 좋은데, 동양적 정신이 너무 파괴되었다. 그 결과 물질주의와 이기주의가 과도하고, 정당 언론 대학 NGO 등 가치집단이어야 할 집단까지 이익집단으로 변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김: 심지어 국가기구인 국회까지 국회의원들 이해관계만 난무하는 이익집단이 되고 있다.

박: 정당도 그렇다. 당연히 가치집단이어야 하지 않나? 그런데 과연 그런가? 기업과 노조도 마찬가지이다. 언론도 대학도 가치집단이어야 한다. 그런데 어떠한가? 심지어 종교단체까지 이익집단화되는 경향이 있다.

김: 평소 주장하시는 공동체 자유주의의 공동체 부분을 생각나게 한다. 온전하게 생성되고 유지될 수 있느냐 걱정된다는 뜻이다.

박: 그렇다. 공동체 자유주의는 이기적 자유주의가 아니라 공동체를 소중히 하는 자유주의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분명 자유주의 속에 국가발전과 개인행복의 원리가 있다. 이는 역사가 증명한다. 그러나 자유주의가 이기주의로 폭주하여 공동체적 가치와 결속을 해쳐서는 국민통합도 깨어지고, 자유주의 자체도 지속 가능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자유주의에서 국가발전의 원리를, 그리고 공동체주의에서 국민통합의 원리를 찾아야 한다.

◆포퓰리즘과 이해관계에 잡힌 국가

김: 결국 누군가는 공동체를 잘 지켜내어야 하는데, 이 점에서 국가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아닌가?

박: 그렇다. 국가가 우선 자유시장과 공정경쟁을 막고 있는 독과점 구조, 특권적 유착 구조를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 그리고 국가는 빈곤 차별 환경 등 시장경제가 풀 수 없는 문제를 감당해 주어야 한다. 그러면서 자유주의의 입장에서 민간이 할 수 있는 일이나 지방이 할 수 있는 일은 민간과 지방에 넘겨주어야 한다. 민간이나 지방이 할 수 없는 일만 국가가 나서야 한다.

김: 그런데 이게 문제다. 이런 일들이 모두 기득권 구조에 함몰되어 있다. 국가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되기도 한다. 우선 공정경쟁이나 공정거래 부분만 해도 그렇다. 정부에 있을 때 나 나름 신경을 많이 썼다.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가장 적절한, 또 쉽게 합의를 볼 수 있는 조치로 생각되어서였다. 그러나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기존의 이해관계 구조 속에 함몰되는 느낌이었다.

박: 맞다. 비슷한 경험이 있다. 이들 재벌의 독과점 구조를 고치려다 시장과 언론으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았다. 사실 진정한 보수주의자라면 자유주의를 소중히 하여야 하기 때문에 독과점 특권 등을 결코 용납해선 안 된다. 그러나 현실은 꼭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 보수는 소신을 가진 철학적 보수가 적고 이해관계에 밝은 정치적 보수가 많다. 이래선 안 된다.

김: 민간이나 지방이 할 수 있는 일을 민간이나 지방에 넘기는 문제도 그렇다. 쉽게 되지 않는다. 지방으로 넘기는 것만 해도 중앙정치권과 중앙행정권의 이해관계에 가로막혀 있다. 또 차별 시정을 위한 복지 문제도 제대로 가는 것 같지 않다. 포퓰리즘과 이해관계의 덫에 걸려 있는 것 같다.

박: 우선 논의 구조부터 잘못되어 있다. 복지에도 여러 차원의 복지가 있다. 북쪽의 동포들까지 생각하는 '민족복지'가 가장 중요하다. 다음은 국민 전체의 수준을 향상시키는 '국민복지'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빈부격차를 줄이는 '계층복지'가 있다. 우리는 민족복지나 국민복지 문제에는 관심이 적고 계층복지에만 논쟁이 많은데 그것은 잘못이다.

김: 어떤 복지를 하느냐에 따라 국가의 역할이나 재정 규모 등이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인가?

박: 그렇다. 그리고 복지의 주체도 문제다. 국가만이 복지의 주체가 아니다. 가족 기업 종교NGP 등이 다 복지의 주체가 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 국가가 복지를 선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들 민간 부문이 보다 복지활동을 잘 하도록 자극을 주고 여건을 만드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

김: 소위 보충성의 원칙, 즉 어떤 문제든 국가에 앞서 교회를 비롯한 공동체가 먼저 기능을 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19세기 후반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을 목격한 교황 레오 13세가 선언했고, 지난해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그 정신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매일신문이니까 한마디 해 둔다.

박: 아무튼 복지 문제는 그 내용과 주체 등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OECD 국가들의 평균 복지지출이 GDP의 몇%인데 우리는 너무 작다든가, 피케티와 같은 학자가 부자증세를 주장했으니 우리도 해야 한다든가 등은 큰 의미 없는 이야기이다. 모든 정책은 역사와 현장 속에 뿌리를 두고 나와야 한다. 우리는 남북이 분단되어 국방비 부담이 적지 않고 앞으로 통일 후 북쪽 동포의 경제발전 문제까지 우리가 풀어야 하는 상황이다. 외국과의 단순 비교는 별 의미 없다.

김: 결국 논의 자체가 포퓰리즘이나 기득권 구조에 끌려다닌 결과 아니겠나. 늘 말씀하시는 국가 단위의 전략적 사고도 없고, 국정 관리와 의제 관리도 엉망이라는 이야기이다.

◆지식인 공론과 새로운 역사적 주체

박: 세계화가 진행될수록, 이해관계가 복잡할수록 국가 단위의 국가비전과 국가전략이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오래전부터 정권 차원을 뛰어넘는 대단위 싱크탱크로서 '국가전략원' 같은 기구의 설치를 주장해 오고 있다. 앞으로는 전략 기능이 국가의 핵심 기능의 하나이다. 개별적 이익을 앞세우는 시장과 민간 부문은 이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김: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국가 단위의 전략도 마련하게 하고, 그 속에서 가치집단이 이익집단화 되는 것도, 또 개인의 자유가 공동체의 이익을 해치는 것도 막을 수 있나?

박: 우선 국가의 공론을 세워야 한다. 율곡 선생은 이해 당사자의 의견이 아니라 사심 없는 전문가의 의견 즉 선비들의 의견을 공론이라고 했다. 그리고 지금의 여론처럼 단순한 세간의 다수 견해를 중론이라고 했다. 또 떠돌아다니는 근거 없는 소문을 부의라 했다. 변덕이 심한 중론이나 부의가 조정을 지배하면 그 나라는 망한다고 했다. 나라가 잘되려면 공론이 바로 서야 하고 그래서 공론을 세우는 선비를 나라의 원기라고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이론과 실무에 밝은 지식인들이 진영 논리나 지역 구도에서 빠져나와 올바른 국가공론을 세워야 한다.

김: 쉽지 않은 일이다. 진영 논리가 워낙 강하고, 이해관계 대립도 심하다. 지식인들을 향해 늘 어느 편이냐를 묻는 상황이다. 분열 구도를 넘어서기가 쉽지 않다. 자칫하면 외톨이가 되어 버린다. 경제적 손실이 따르는 경우도 있다. 조선의 선비들은 농사를 지어 밥은 먹었겠지만 지금은 잘못하면 밥줄이 끊어진다.

박: 그래서 신분도 보장되고 월급도 받는 '21세기 집현전'인 '국가전략원' 같은 조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또 일반 지식인들의 민간 싱크탱크 운동도 다다익선이다. 물론 용기를 가지고 공론을 세우려면 정치적 경제적 어려움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나라와 민생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또한 생각해 보면 조선의 선비들이 더 어렵지 않았을까? 그때는 공론을 세우고 직언을 하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했다. 지금은 그런 상황까지는 아니지 않은가? 우리 지식인들이 좀 더 용기를 가져야 한다.

김: 지식인 중에서도 국정이나 조직 운영 경험을 가진 지식인들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 같다.

박: 우리가 해 나가야 할 일은 즉 국가개혁은 자전거 위에 올라 달리면서 바퀴를 갈아야 하는 일만큼 어렵다. 국가개혁이 성공하기 위해선 최고 지도자의 대담한 결단과 더불어 이론전문가와 현장전문가들의 치밀한 지혜와 용기, 전략이 필요하다. 특히 국정이나 조직 운영의 경험을 가진 지식인들의 역할이 소중하다.

김: 이들 지식인들 고유의 이견이나 대립도 있을 수 있지 않겠나? 기존의 분열 구도나 이해관계를 벗어났다 하더라도 이들끼리 또다시 다른 차원의 분열과 대립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

박: 보수와 진보로 이야기해 보자. 보수의 기본가치는 기본적으로 '자유와 공동체'이다. 그리고 진보의 기본가치는 '평등과 연대'라 본다. 얼마든지 상호보완적일 수 있다. 이를테면 자유가 다수의 자유가 되려면 당연히 평등의 가치를 받아들여야 한다. 또한 공동체의 건강을 유지하려면 당연히 연대 즉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생각해야 한다. 합리적 보수와 합리적 진보는 모든 정책 논의에서 약 70~80%는 같은 결론이 나오게 되어 있다.

김: 가능성이 어느 정도일까에 대해서는 사람에 따라 이견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일이 있어야 한다는 데 대해 많은 사람들이 동의를 하고 있다. 또 여기저기서 비슷한 고민을 하는 지식인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

박: 학자 전문가들 사이에 공론이 형성된 다음에도 문제는 있다. 이 공론을 받아 실천해 줄 정치세력이 있어야 하는데, 이게 만만치 않다. 산업화에도 역사적 주체세력이 있었고, 민주화에도 주체세력이 있었다. 이제 선진화와 통일의 시대인데 이를 위해 몸을 던지는 역사적 정치적 주체세력이 잘 안 보인다.

김: 정당은 어떤가?

박: 기존 정당은 4년 임기에 단기적 관점을 가진 국회의원들이 점령하고 있다. 큰 비전이 나올 수 없고, 장기적 전략에 관심을 가질 리 없다. 지금의 정당들이 국민과 역사에 뿌리를 두고 국가전략을 가진 국민정당, 가치정당으로 거듭나야 하는데 쉽지 않다. 어쨌든 선진과 통일의 시대를 열기 위해선 기존 정당을 대대적으로 혁신시켜 만들든, 아니면 새로운 인재들이 모여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든 21세기 대한민국을 이끌 새로운 역사적 주체를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사진 이성근 객원기자

시간:1월29일 오전 10시-오후 3시

장소:서울 광화문 소재 (사)대한민국지식중심 사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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