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도청 시대 하회마을] ②하회마을의 사랑, 아가페와 에로스

800년 전 부용대 애틋한 사랑…고려시대판 '로렐라이 언덕'

하회마을 부용대 절벽에는 하회탈을 깎던 허 도령과 이웃집 의성김씨 처녀의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슬픈 전설로 전해온다. 하회마을 사람들은 각시탈을 17세 의성김씨 처녀로 보고 마을 성황신으로 모시고 매년 정월 대보름 성황제를 지낸다.
하회마을 부용대 절벽에는 하회탈을 깎던 허 도령과 이웃집 의성김씨 처녀의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슬픈 전설로 전해온다. 하회마을 사람들은 각시탈을 17세 의성김씨 처녀로 보고 마을 성황신으로 모시고 매년 정월 대보름 성황제를 지낸다.
하회별신굿에 등장하는 부네와 이매탈이 안동시 이천동 연미사 제비원 앞에서 과거 보러 떠난 선비를 기다리다 지쳐 미륵이 됐다는 애틋한 전설을 설명하고 있다.
하회별신굿에 등장하는 부네와 이매탈이 안동시 이천동 연미사 제비원 앞에서 과거 보러 떠난 선비를 기다리다 지쳐 미륵이 됐다는 애틋한 전설을 설명하고 있다.
조선 중기 450년 전 남편을 여읜 한 여인(원이엄마)이 쓴 사부곡 편지글은 남편의 병구완을 위해 자신의 머릿카락을 잘라 미투리를 삼아 천지신명께 빌었다는 얘기를 담아 전하고 있어 450년 후에도 세인들을 감동시키고 있다.
조선 중기 450년 전 남편을 여읜 한 여인(원이엄마)이 쓴 사부곡 편지글은 남편의 병구완을 위해 자신의 머릿카락을 잘라 미투리를 삼아 천지신명께 빌었다는 얘기를 담아 전하고 있어 450년 후에도 세인들을 감동시키고 있다.

라인강변 로렐라이 언덕은 독일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관광 명소다. 그저 평범하고 가파른 강변 절벽에 지나지 않는 로렐라이 언덕에는 연간 1천만 명에 이르는 관광객이 구름같이 모여든다. 강물의 침식에 의해 나타난 하안단구(河岸段丘)의 일부일 뿐인 로렐라이 언덕에 왜 사람들이 열광할까. 로렐라이 언덕이 지닌 문화적 의미와 관광 산업적 가치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사랑에 실패한 한 소녀의 안타까운 이야기가 전설이 된 로렐라이 언덕. 바로 애틋한 사랑을 소재로 한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 세계인들의 관심을 이끌어 내는 원동력이다. 하회마을에도 이에 못지않은 한 처녀의 애절한 사랑이 낙동강변 절벽 부용대에 숨어 있다.

◆하회마을 부용대는 한국의 로렐라이

"로렐라이 언덕을 처음 오르면서 강한 전율을 느꼈습니다. 문득 하회마을 부용대가 오버랩되면서 숨이 멎는 듯했지요." 하회별신굿탈놀이 전수조교인 손상락(56) 학예사는 로렐라이 언덕에 오른 뒤 비로소 하회마을 전설이 가히 세계적임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하회탈 제작에 얽힌 전설은 이렇다. 800년 전 고려 중기, 허도령이란 사람이 산신령의 계시를 받고 마을 한쪽 탈막에 들어가 탈을 깎기 시작한다. 마을에 닥친 액운을 막기 위해서다. 탈을 완성할 때까지 아무도 보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보게 되면 부정을 타 목숨을 잃게 된다는 경고도 같이 받았다. 양반탈과 선비탈, 각시, 총각, 부네, 백정, 할미, 초랭이, 별채, 떡다리, 중탈을 만들고 마지막으로 이매탈 턱을 만들고 있을 때 평소 허도령을 사모하던 이웃집 의성 김씨 처녀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문구멍을 뚫어 들여다보는 바람에 허도령이 그만 피를 토하고 죽게 된다. 이 때문에 열두 가지 하회탈 가운데 이매탈은 미완성이다. 그래서 턱이 없다.

"의성 김씨 처녀는 너무도 어처구니없이 사랑하는 이를 잃게 됩니다. 못다 한 사랑을 탄식하며 허도령을 고이 묻어 준 17세의 처녀는 사랑하는 이의 분신 같은 탈을 모아 하회별신굿을 완성하게 되지요."

탈에 얽힌 전설에 이어 손 씨의 스토리텔링은 탈춤의 탄생 과정에서 나온다.

사랑하는 허도령을 졸지에 잃은 의성 김씨 처녀는 무동마당, 주지마당, 백정마당, 할미마당, 파계승마당, 양반선비마당을 차례로 만든다. 나중엔 허도령을 신랑으로, 자신을 각시로 하는 혼례마당과 첫날밤 신방마당도 엮어 낸다. 허도령과 못다 이룬 사랑의 한을 풀기 위해서다.

탈춤이 모두 완성되고 첫 공연이 끝날 즈음 처녀는 홀연히 일어나 버선발로 부용대에 오른다. 치마폭 머리에 쓰고 한 송이 연꽃이 되어 절벽 아래 낙동강으로 몸을 던진다. 먼저 간 허도령을 따라간 것이다. 이후 하회마을 사람들은 의성 김씨 처녀를 성황신으로 800여 년간을 모신다.

이에 비해 로렐라이 전설은 오히려 단순하다. 급류에다 심한 커브 물살이 이는 로렐라이 언덕 아래 라인강 줄기는 조난사고가 끊이지 않던 곳. 사랑하는 남자로부터 배신을 당한 한 소녀가 슬픔을 이기지 못해 언덕 아래 강물로 뛰어든다. 이후부터 로렐라이 언덕에 나타난 소녀의 영혼은 뱃사공들을 유혹하는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어디선지 들려 오는 노랫소리에 취한 뱃사공들이 정신을 잃고 배가 급류에 휩쓸려 죽음을 맞게 된다는 내용이다.

◆꿈의 시대, 감성으로 관광객을 부른다

"로렐라이 전설이 관광 소재가 되기까지는 다양한 스토리텔링이 있었습니다. 1824년 독일의 유명한 시인 하이네가 시로 읊어냈고, 이 시구는 독일 민요 가사가 돼 전 세계로 퍼져 나갔지요."

손 학예사는 하회마을의 전설도 여러 장르로 불리고, 다양한 콘텐츠로 개발될 때 비로소 로렐라이처럼 세계인들을 불러모으는 관광산업적 기반이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하회마을에 시인들과 작곡가들이 모일 수 있도록 해야 하고, 그래야 슬픈 이야기가 애절한 노래가 돼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에로스적인 사랑뿐 아니라 겸암과 서애의 우애와 자식사랑 등 아가페적 사랑도 한국 특유의 소재가 될 수 있다. 가령 소녀시대나 싸이 등 한류 스타들이 부용대의 애절한 사랑이나 형제애를 노래해 준다면 전설적인 스토리텔링이 되고도 남는다는 것이다.

'현기증을 토하던 신방의 등불도 꺼졌다/ 양지바른 성황당에 진달래로 피어나/ 아련한 그리움이 춤을 추며 헤맨다/ 부용대에 오르는 발걸음이 새털처럼 가볍다/ 가만히 눈을 감고 이제야 님을 따라간다/ 한 송이 연꽃이 강물 위에 떨어진다.'

"하회마을 부용대는 로렐라이 언덕을 뛰어넘는 수려한 자연경관에다 사랑의 애절함이 배어 있는 곳인데도 우린 이때까지 꼭꼭 숨겨놓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실제는 그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제 온 세상에 알려야 할 때입니다."

외형적 요인으로만 관광객을 유인하던 시대는 지났다. 고택과 지형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이다. 로렐라이 언덕은 라인강변의 보잘것없는 절벽이지만, 전설을 스토리텔링으로 재구성하면서 지구촌 세계인들의 가슴속에 오롯이 살아 숨 쉬고, 꼭 가보고 싶은 관광지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미 꿈의 시대(Dream Society)에 진입했으며, 현대인들은 단순한 제품 구매보다 그 안에 담긴 꿈과 이야기를 구매하고 싶어한다. 네덜란드 미래학자 롤프 예센은 "정보화 시대가 지나면 소비자에게 꿈과 감성을 제공하는 것이 차별화의 핵심이 되는 '꿈의 시대'가 도래한다. 미래에는 이야기와 꿈이 부가가치를 만들 것"이라고 했다.

◆가장 지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

로렐라이 전설과 유사한 사랑 이야기는 지구 반대편 뉴질랜드에도 있다. 뉴질랜드 북섬 '로토루아' 호수에 얽힌 마오리족 처녀 '히네모아'의 저돌적이고도 용기있는 사랑 이야기는 뉴질랜드 북섬 관광산업의 바탕이다.

'비바람이 치던 바다/ 잔잔해져 오면/ 오늘 그대 오시려나/ 저 바다 건너 서'로 시작되는 연가(戀歌)의 고향인 뉴질랜드 북섬에는 도시 이름도 호수 이름을 띤 로토루아이며, 시내에는 주인공 히네모아의 거리도 조성해 관광산업에 적극 활용하고 있다.

원주민인 마오리족도 '오랜 원수지간이었던 두 부족이 족장의 딸 히네모아의 순수한 사랑이 끝내 맺어지면서 부족 간 평화도 이뤄낸다'는 해피엔딩 전설을 바탕으로 이미 세계 젊은이들의 노래가 된 연가(마오리족 민요)를 매일같이 합창한다. 사랑의 호수 로토루아에 몰려드는 관광객은 연간 400만 명이 넘는다. 가장 지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란 걸 잘 보여 준다.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래도 살 수가 없어요/ 어서 당신 계신 곳으로 나를 데려가세요/ 이 내 마음 어디에 두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가 있을까요/ 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자세히 말해주세요/ 하고 싶은 말 그지없지만 이만 적습니다.'

병든 남편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미투리(짚신)를 삼고 천지신명께 지성으로 빌었지만 결국 남편은 세상을 떠나버렸다. 황급히 먹을 갈아 글을 쓰고 자신의 속옷과 배냇저고리를 챙겨 편지와 함께 남편의 관 속에 넣었다.

1998년 7월 안동시 정상동 신도시 개발 현장에서 450년 된 무덤 속에서 조선 중기 한 여인의 편지글과 머리카락으로 만든 미투리가 출토됐다. 고성 이씨 귀래정파 며느리 '원이엄마'의 애절하기 그지없는 망부가(亡夫歌)는 세계적인 잡지 '내셔널지오그래픽'에 소개되면서 한국 여인의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가 지구촌 세계인들을 감동시켰다.

안동에는 하회마을 부용대와 하회탈에 얽힌 전설에 못지않은 실존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고, 남녀 간의 사랑을 테마로 한 스토리텔링 소재가 적잖은 곳이다.

한 낭자가 과거를 보기 위해 서쪽으로 떠난 선비를 기다리다가 그만 돌부처가 됐다는 안동 연미사의 제비원 미륵에 얽힌 전설도 하룻밤 풋사랑이지만 애틋하고 순수한 사랑을 절절히 그려내고 있다. 민속놀이 놋다리밟기의 소재가 된 고려말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못다 한 사랑도 이곳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모두 로렐라이와 로토루아의 전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권두현(51) 경북미래문화재단 이사는 "셰익스피어의 소설 로미오와 줄리엣이나 소설 춘향전의 도시 남원과는 달리 전설을 소재로 한 스토리텔링은 상상 밖의 파급 효과를 얻을 수 있다"며 "남녀 간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다양한 형태로 전해지고 있어 이를 한데 엮어 재구성할 경우 세계적인 도시 이미지의 새로운 연출도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신도청권 전략기획팀=권동순 기자 pinoky@msnet.co.kr 심용훈 객원기자 goodi6849@naver.com 사진작가 강병두 plmnb1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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