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 이런 자리도 있었나?" 10여 년 전 대구에서 농협 조합장 선거를 취재하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단위 농협 조합장이 그렇게 막강하고 힘있는 자리인 줄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조합장에게 제공되는 각종 혜택은 대구시내의 웬만한 구청장보다 훨씬 나은 듯 보였다. 당시에도 규모 있는 조합의 경우 조합장에게 비서와 운전기사는 기본이고, 1억원 가까운 연봉과 그 비슷한 액수의 판공비가 제공됐다. 거기다 예산 수십억원의 용처를 정하고, 이사진 구성과 직원 인사권까지 한 손에 쥐고 있는, 요즘 말로 하면 '울트라 슈퍼갑(甲)'이나 마찬가지였다.
재미있는 것은 그때 24년을 연임한 조합장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 조합장이 워낙 고령이라 그만뒀으니 망정이지, 본인 마음먹기에 따라 더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전국적으로 20년 넘게 연임한 이들이 적지 않다고 하니 조합장 본인은 얼마나 즐거운 나날을 보냈을지 쉽게 상상이 간다. 이들이 그렇게 오래 조합장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당연히 전원일기의 양촌리 '김 회장'처럼 인품이 있거나 조합 자산을 크게 불린 출중한 조합장도 있다. 그렇지만 상당수는 몇천 명에 불과한 조합원을 돈이나 향응으로 구워삶을 수 있는 기본 자질(?)을 갖고 있는 이들이다. 당선되고 나면 핵심 선거참모를 이사진으로 앉혀 이권을 나눠주고, 유력 조합원에게는 각종 혜택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자리를 보전했다고 한다. 부유한 조합의 경우 자신이 선거 때 뿌린 돈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어느 정도 회수해가는 것은 물론이다.
요즘은 연임제한 규정도 생기고 과거와는 달라졌다고 하지만, 조합장 선출 방식과 조합 운영 방식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시스템이 바뀌지 않으니 구태도 답습하기 마련이다. 조합장 출마자들은 선배들의 전철을 밟아 습관적으로 '돈'으로 표를 사고, 돈과 향응에 길든 조합원들은 금권선거를 방임 내지 조장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다. 3월 11일의 농'수'축협'산림조합장 선거를 앞두고, 농어촌 현장에서 들려오는 실태는 정말 끔찍하다. 좀 비약하면 1950년대 자유당 선거 때를 연상시킬 정도로 심각하다. 가끔 선관위나 검경에서 불'탈법선거 적발 사례를 발표하지만, 현장 상황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농어촌 유권자들의 대체적인 생각은 걸리지만 않으면 그만이라 여긴다. 돈이나 향응을 받아도 이웃 간에, 어릴 때부터 아는 사이에 신고할 리 없다고 생각하고, 설령 신고하고 싶으면 고향을 등질 각오를 해야 한다. 조합 규모에 따라 '5당4락'(5억원 당선, 4억원 낙선), '10당8락'(10억원 당선, 8억원 낙선)이라는 얘기가 나돌 정도로 타락의 극치를 보여준다.
조합장 출마자들 사이에서도 '이번 선거가 끝나면 우리나라에 교도소 1, 2개를 더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농담을 할 정도다. 요즘 농어촌 지역 국회의원, 지방선거 출마자들은 조합 선거의 영향으로 돈이 너무 많이 든다고 하소연한다. 조합 선거에서 돈맛을 들인 유권자들이 끊임없이 요구를 해대는 바람에 죽을 지경이라는 것이다. 수십 년간 온갖 캠페인과 실천대회, 강한 처벌 등으로 공명선거 분위기가 정착되는가 했더니 조합 선거 때문에 '금권선거'가 또다시 판을 치는 시대가 된 듯하다.
이런 선거를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가. 유권자는 별다른 죄의식을 못 느끼고 있는 상황에서 엄벌주의로 해결할 수 있을까. 외국처럼 이사회 호선이나 간선제로의 전환, 혹은 완전한 무보수 명예직으로도 조합 운영이 가능한데도 이런 금권선거를 왜 방관하고 있는가. 조합을 자신의 선거에 활용해온 국회의원들의 이기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국민 수만 명을 잠재적 범죄자로 만들고 있는 이런 선거방식은 확 뜯어고치는 것이 옳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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