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저는 평생 참으면서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성인이 된 딸이 상담을 받아보자고 해서 고민을 올립니다. 오늘도 제 얼굴의 멍 때문에 선글라스를 꼈습니다. 죄송합니다. 남편이 5대 독자라서 제가 시부모님은 물론 시조모까지 모시고 살았습니다. 주위에서는 현모양처라며 칭찬하지만, 남편은 단 한 번도 칭찬하지 않았고 오히려 제가 힘들어 조금이라도 불만을 드러내면 남편이 "네가 우리 집에 와서 한 게 뭐 있노!"라고 하는데 이것이 너무 억울합니다.
남편은 30년 이상 함께 살며 크고 작은 일 모든 부분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고 음주 폭행이 심했으나 집안의 그 누구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돈 쓰는 것은 물론이고 외출이나 모임 등 모든 것은 남편의 허락하에 가능했습니다. 하물며 타지방에서 대학을 다니는 자녀의 귀가 시간과 일상생활까지도 통제하고 있어서 자녀들도 아버지를 멀리하고 있으나 감히 대들지는 못합니다. 아버지가 잘못되었다는 표현을 하면 당장 금전으로 자녀를 통제하고 인연을 끊자고 하니 본인들이 경제력을 갖출 때까지는 순종한다고 합니다. 남편의 가부장적이고 강박적인 성격과 음주 후 폭력을 더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남편은 절대 이혼할 수 없다고 하겠지만 저는 이제 더 이상 참고만 살 수 없습니다. 이제는 자유롭게 내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도와주세요!
◇해법=강박적이고 가부장적 성격의 남편과 순종적이고 헌신적인 아내의 삶이 그림처럼 그려집니다. 어쩌면 이 시대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전통 가정의 모습일지도 모르겠군요. 귀하의 남편은 가족을 잘 이끌어가야겠다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은 뒤로한 채 음주와 폭력으로 가족을 통제하고 억압해 자신까지 망가뜨리며 원치않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귀하는 다행히도 건강한 성인으로 자란 딸이 부모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판단 아래 용기 있게 부모를 설득해 상담실로 안내해 변화의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귀하의 남편은 스스로 독재자 같다고 전혀 느끼지 못하며 안정된 직장과 경제적 능력을 갖춘 엘리트 가장으로서 통솔력을 발휘하며 가정을 잘 꾸려온 것 같습니다. 특히 강박적이고 완벽주의적인 성격과 가부장적 사고의 틀(5대 독자로서 가문을 잘 이어가야 한다는 일념 등) 속에서 가족 구성원 모두를 자신의 틀 안으로 끌어들이며 여기서 벗어나는 가족은 누구든 가장인 자신에 대한 거부와 반항으로 간주해 완력을 행사하며 가족을 온전하게 자신의 뜻대로 지키려고 애쓰며 살아온 겁니다.
현모양처인 귀하가 30여 년간 인내와 헌신으로 살아온 덕분에 가정이 해체되지 않고 자녀들이 건강한 성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시조모, 시부모 등을 모시며 그분들이 자신의 보금자리에서 생을 마감할 수 있었습니다. 남편의 칭찬이나 인정 한마디 없이 역할을 수행한 귀하의 노고가 분명히 헛된 것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부부로서 동등한 입장은커녕 인간으로서 존중받지 못하고 부당한 대우에도 참고만 살아온 것은 분명히 귀하가 가진 전통적 신념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제 중년을 훌쩍 넘긴 귀하의 30여 년 결혼생활 중 온전히 자신을 위한 삶이라곤 찾아볼 수 없으며 남편의 부당한 대우에도 참고만 살았기에 지금 신체적 질병과 심리적 허무 등으로 더 이상 버틸 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귀하가 바라는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 자유롭게 사는 삶'을 살 방법은 먼저 자기 자신을 되돌아 보는 일입니다. 즉 '나는 참 괜찮은 사람'이라는 자존감과 '내 탓'이라는 나의 책임 부분을 직면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변화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남편의 변화에 대한 방법을 찾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남편의 그늘 속에 수동적으로만 매여 살아왔기 때문에 귀하가 익숙한 삶의 테두리를 벗어나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것은 모험입니다. 특히 가부장적 남편은 불편 없이 살아왔기 때문에 자신의 변화는 생각하지도 않으며 아내의 도전은 용납하기 어렵습니다. 이전보다 더 심한 폭언과 폭력을 예측하며 구체적 대비책을 마련하고 남편의 저항을 이겨내야만 내가 원하는 삶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열심히 살아온 귀하의 곁에는 법과 제도(가정폭력방지법)가 있고, 든든한 자녀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또 귀하가 가진 성실함, 인내심, 열정과 가족애 등으로 충분히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망가진 내 모습은 나부터 보기 싫으며 내가 건강해야 남편이 있고 아들과 딸이 있습니다. 용기를 잃지 않고 구체적 기술을 배우며 실천한다면 나의 자유로운 인생과 우리 가족의 행복한 미래는 보장됩니다.
본 사례는 중년에 도달한 주부가 일생 가정에 헌신하고 남편에게 순종하며 자녀를 훌륭하게 키워내느라 자신이 망가져 인생의 허무를 느끼며 삶의 의욕을 잃은 경우다. 특히 서로 믿고 사랑하며 의지해야 할 남편은 가장으로서 자신의 역할과 책임에만 매여 아내의 힘든 심정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아내 또한 처음에는 전통적 신념, 참는 것이 미덕이라는 생각으로 남편을 이해하고 가정의 안정을 추구하며 자식을 위하여 자신을 억압하고 살아간다. 본 사례자도 자신의 욕구가 강하고 능력도 있으나 전통적 가치관에 지배되어 참고만 살아온 것이다. 대처 방안으로 우선 자존감을 높이고, 자기 내면의 욕구를 알아차리고 인정하도록 하며, 착한 척(?) 하는 것을 내려놓도록 한다. 남편의 통제 때문에 못했던 자기계발이나 여가 활용 등을 구체화하고 남편의 거센 반발이 생길 때 단호하게 대처하는 기술을 가르친다. 예를 들면 폭력 시 외부에 알리기(가족, 친지, 112 등)를 독려하고 실천하도록 돕는다. 본 사례자의 경우 남편을 이해하고 함께하도록 하는 것은 살아온 만큼의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아내 자신이 먼저 변화를 시도하며 배우자가 그 뒤를 따르도록 해야 한다. 배우자의 몫은 스스로 판단하도록 배우자에게 맡겨야 한다. 필자는 끊임없이 사례자의 진정한 바람을 탐색하며, 가진 자원을 발견하도록 도와 행복한 삶에 도전하도록 격려하고 또 격려한다.
박경규(사단법인 영남가정폭력상담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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