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묵(호칭은 생략'전 수성아트피아 관장)은 서울 왕십리에서 태어나 대구에 둥지를 튼 사나이다. 대구 문화예술계에서 활약한 세월만 40년이다. 한 세대(30년)를 훌쩍 넘었다. 이제는 다른 곳으로 갈 생각도 없다. 지역의 문화예술 발전을 위해 시쳇말로 '뼈를 묻겠다'고 주저 없이 말한다.
댓바람에 "대구가 뭐가 좋으냐"고 묻자, "숙명 또는 운명이랄까. 대구와 인연을 맺었죠. 그런데 살다 보니, 대도시로서 갖춰야 할 것은 다 갖춰진데다 자녀들 교육 여건도 좋아 다른 곳으로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극작가로 발돋움하는 데도 대구가 모든 자양분을 공급하는 예술활동의 기반이자 기회를 제공한 땅이었습니다. 이제 대구 이야기를 빼면, 제 인생 스토리의 알맹이가 송두리째 빠져버립니다." 2일 오후 이번 시리즈 5탄의 주인공인 최현묵을 2시간가량 파헤쳤다.
◆대구는 내 운명, 기회의 땅
최현묵은 대구에서 40년 동안 생활하면서, 큰 불만이 없다. 교통'교육'의료'관광 등도 좋지만 특히 대구 사람들이 좋다. 물론 이제 자신도 대구 사람이다. 태어나긴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살아온 터전은 대구다. 서울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구미 금오공고에 첫 기수로 입학했다. 당시 1회 졸업생들은 산업전선이 아닌 군 복무를 의무적으로 해야 했다. 이 때문에 그는 운명처럼 대구 K-2 공군기지에서 기술하사관으로 5년 동안 복무해야만 했다.
이때부터 최현묵은 극작가로서의 싹을 틔운다. 군 의무복무 기간은 5년인데, 제대 1년 전부터 영남대 영문학과에 입학해 주경야독을 했다. 그리고 군 전역 이후 지역 문화예술 발전의 큰 기둥이었던 고(故) 이필동 연출가 집안(필동-기동-창동-준동)의 넷째인 이준동 영화제작자와 김미정 연출가(현 대구가톨릭대 교수)와 함께 영남대 문과대 연극반을 창단했다. 이것이 그의 예술활동의 첫 단추였다.
천생배필(天生配匹)도 대구에서 만났다. 영남대 천마극단에서 배우로 활약했던 여대생과 첫눈에 백만 볼트의 전류가 흘렀다. 하늘이 정해준 천생연분처럼 결혼에도 골인했다. 그의 부인은 영남대를 대표했던 천마극단에서 배우로 활약했을 뿐 아니라 예술적 재능이 뛰어나 매일신문 신춘문예 동시 부문에서도 당선된 바 있다. 둘은 연극이라는 공통분모로 만나 평생 지역의 문화예술인 부부로 살아가고 있다.
"참 신기하죠. 대구와 묘한 인연이 있어요. 대구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면서, 저는 극작가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영광을 다 누렸어요. 1980년대 전국 희곡 관련 큰 상을 휩쓸다시피 했습니다. 생계를 위해 경남 창녕에서 교사 생활을 할 때도, 예술활동은 대구에서 했습니다. 대구는 저에게 문화예술인으로서의 기반이 된 토양입니다."
◆대구를 위해 일할 기회, '해피타임'
최현묵은 대구에 정착하면서, 대구의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됐다. 대구라는 도시가 갖고 있는 장점만이 눈에 들어왔고, 답답하거나 좋지 않은 면은 되도록 개인적으로 극복하려 노력했다. 그는 "제가 활동하기에 대구의 문화예술 역량은 충분하다고 봅니다. 대구는 전국 어느 도시와 비교해도 살기 좋은 여러 가지 여건들을 고루 갖춘 훌륭한 도시"라고 자부했다.
30대의 나이에 극작가로서 전국 규모의 희곡 관련 대회에서 큰 상을 휩쓸었던 최현묵은 서울에서도 스카우트 제의를 많이 받았다. 하지만 그는 대구를 떠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자신에게 극작가로서 활동하는 데 뿌리와 같았던 대구를 떠날 결심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부인과 아들, 딸도 서울보다 대구가 좋다고 했다.
40, 50대 때, 최현묵은 대구경북의 굵직한 세계대회 및 국내행사를 위해 열정을 불살랐다. ▷1998년 경주문화엑스포 ▷2000년 대구새천년축제 ▷2002년 월드컵 대구 문화행사 ▷2003년 대구유니버시아드대회 ▷2011년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 등의 기획 및 연출 분야에서 맹활약했다. 그 덕에 대통령 표창 2회, 포장 1회를 수상하는 영광도 누렸다. 2004년 금복문화상, 2014 대구예술상도 거머쥐었다.
"돌아보면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저에게 기회를 준 땅, 지역을 위해 일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 해도 큰 기쁨이었고요. 대구의 이 국제행사들이 결국은 대한민국을 위한 중요한 일들이었으니까요. 남은 세월 역시 지역의 문화예술 발전을 위해 온 힘을 쏟을 계획입니다."
야인생활 다시 말해 프리랜서로 오랫동안 살아온 그는 3년 전 수성아트피아 관장이라는 첫 관직에 진출하기도 했다. 대구에서 처음으로 안정된 직장을 가진 것이다. 그리고 수성아트피아를 2년 동안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극장의 비전 제시 및 시스템 구축, 연간 기획, 자체 프로그램 제작 등으로 공익성과 수익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았다.
◆대구가 참 좋지만, 이런 땐 '깝~깝~'
"지역에서 99명의 인맥을 만들어도, 1명의 적을 만들지 말라."
최현묵은 이 말을 가슴에 새기고 산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아, 항상 마음이 괴롭다. 대구라는 땅이 250만 명이 넘는 인구가 살고 있지만 실제로 이래저래 얽히는 관계자들을 만나다 보면, 좁아도 너무 좁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특히 문화예술인들은 각자 라인을 구축하고, 서로 험담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타지에서 온 그는 초'중'고 인맥도 없을뿐더러 지역 문화계의 파워 인맥들과 관계 설정이 가장 큰 고민이다.
"저는 특정 계파에 속하거나 파벌을 짓는 것을 원치 않았는데, 대구라는 지역색이 그 신념을 많이 흔들더라고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평가할지 모르겠지만, 전 이런 고민 속에 저 나름대로 전문성과 내공을 쌓는 데 주력했다고 자부합니다. 진정으로 저를 도와줄 사람이 누구인지도 잘 모를 지경입니다."
2013년 말, 수성아트피아 관장 자리에서 2년 만에 물러난 그는 지난해부터 또다시 특정한 수입 없이 강의, 세미나 등의 활동으로 찬바람을 쐬고 있다. 하지만 지난 한 해 동안 또 다른 의미 있는 작업을 해, 올해 초에 선보였다. 바로 '대구연극사'라는 책을 출간했다. 그는 '대구인에 의한, 대구의 연극 역사'라는 부제를 달고, 지난 1년 동안 수많은 각종 관련 서적과 자료 등을 상세하게 검토한 후에 이 책에 대구 연극에 관한 객관적인 역사를 담아냈다.
최현묵은 이 책의 서두에 이런 말을 썼다. '과거와 현재의 대구 연극인들의 이름과 활동을 최대한 담아내고자 했다. 누구에게도 치우치지 않으려 했다. 좋은 점은 최대한 드러내되, 잘못된 점은 최소화하자. 그리고 그동안 나에게 많은 것을 준 대구와 대구 사람들에게 가슴 벅차 오르도록 감사한다.'
기획취재팀 권성훈 기자 cdrom@msnet.co.kr
사진 이채근 기자 minch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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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1957년 서울 왕십리
▷가족=1남 1녀
▷학력=서울 창서초교-서울 배문중-구미 금오공고(1회 졸업생)-영남대 영문학과 학사-성균관대 공연예술학과 석'박사 졸업
▷경력=K-2 공군기지 기술하사관 복무(5년), 경남 창녕 공업고교 교사(10년 근무), 대구 수성아트피아 관장(2년 근무) 역임, 현 대구가톨릭대 겸임교수이자 극작가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 중
▷활동=2002 월드컵 대구 문화행사'2003 대구유니버시아드'2011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 기획 및 연출 분야에서 활동 ▷수상=1985년 삼성문예상 장막극 부문 당선,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1993년 국립극장 장막극 공모 당선, 1996년 전국연극제 희곡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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