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대 후반의 한 독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위기에 처한 대구 종합유통단지를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대구시가 고시한 지구단위계획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매일신문 1월 27일 자 1'3면, 28일 자 4면)는 기사를 쓴 직후였다. 그는 유통단지가 조성되기 전 해당 부지에서 농사를 짓던 농민이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목소리에는 유통단지가 애초 기대와 달리 활성화되지 못한 데 대한 안타까움이 배어 있었다.
그는 유통단지가 조성될 당시의 얘기를 기자에게 소상히 전했다. 유통단지 부지는 애초 총 87만7천여㎡(25만3천여 평) 규모의 농토였다고 했다. 수성들, 서변들과 함께 대구의 3대 곡창지대였다.
조상 대대로 농사를 짓던 농민들은 대구시가 유통단지를 조성한다는 소식에 기꺼이 땅을 넘겨줬다고 했다. 1990년대 초반부터 토지 보상이 시작됐고, 농민들은 계약금으로 보상금의 20%를 먼저 받은 뒤 명의를 대구시에 넘겨줬다. 계약금만 받고 명의를 넘겨준 데는 대구시의 행정에 대한 믿음이 깔려 있었다. 유통단지가 조성되면 국가뿐만 아니라 대구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대승적 생각이 지주들에게 있었다. 대구시도 지주들을 최대한 배려했다.
이 과정에서 300여 명 지주로 구성된 배자못밑지주회를 맡았던 고(故) 서상호 회장이 등장한다. 배자못은 현재 대구시 북구 산격동 청구아파트 자리에 있던 못 이름이었다. 고 서 회장은 대구시가 유통단지를 조성하려는 의도와 비전을 이해하고 지주들을 설득해 대구시 정책에 최대한 협조할 것을 유도했다. 특히 적은 토지 보상금에 불만을 터뜨리는 지주들을 설득하는 리더십도 발휘했다. 부지를 분양받아 점포를 운영하려는 상인들의 권리도 인정했다. 유통단지가 큰 잡음 없이 착공되고 대구시, 지주, 상인이 모두 윈윈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독자는 전했다.
그러면서 고 서 회장의 공로비 얘기를 꺼냈다. 유통단지 조성 과정에서 어른 역할을 했던 고 서 회장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 지주들이 십시일반 돈을 냈고 대구시가 부지를 제공해 건립했다고 한다. 지주와 대구시로부터 큰 지지를 얻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위치를 물어 공로비를 찾았다. 엑스코 인근에 있는 비석 앞면에'시은 서상호 회장 공로비'라고 한문으로 적혀 있었다.
단기 4329년(1996년)에 세워진 공로비는 고 서 회장이 타계하기 5년 전에 만들어졌다. 대구종합유통단지원지주회 이름으로 세워졌고, 국한혼용체로 쓰인 공로비에는 '대구시 종합유통단지가 조성돼 대구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본성이 온량 성실하고 매사에 공직무사하며 신의와 책임감이 강한 분이다.(중략) 1993년 대구시가 토지보상협의를 제의해오자 전 회원들의 의견을 청취 존중하여 대업진보에 반영하고 서로 협조함으로써 대립 분쟁 없이 공평하게 처리하며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라고 적혀 있었다. 당시 대구시 상정과장으로 유통단지 조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이진훈 수성구청장도 큰 분란 없이 일을 처리할 수 있었던 데는 고 서 회장이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대구시도 투명 행정을 펼쳐 고 서 회장이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다시 전화를 한 독자의 얘기로 돌아간다. 사업을 하고 있는 독자는 유통단지가 처음 계획대로 조성됐으면 성공했을 거라고 확신했다. 유통단지 내 이해 당사자들과 충분한 협의 없이 무역센터 건립을 취소하고, 엑스코 확장 과정에서 도로를 폐쇄시킨 것은 상식에 어긋난 행위라고 했다. 사회적 약자들이 행정을 상대하기 위해서 떼를 쓸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리고 있다고 했다. 실제 엑스코 확장 과정에서 도로가 폐쇄된 것을 두고 대구시와 유통단지 종사자 간 소송이 진행 중이다.
시민과 행정이 손을 맞잡고 이해와 양보를 바탕으로 고질적인 현안을 해결하는 아름다운 모습은 과거의 낡은 추억 속에서만 찾아야 하는 것일까. 노년의 독자와 통화를 끊고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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