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출동24시 현장기록 119] 더 큰 감동을 드립니다

2000년대 10여 년을 119종합상황실에서 근무한 나는 감정노동에 한계를 느끼고 하루하루를 버티던 힘겨운 시절이 있었다. 상황실은 시민이 위급하고 필요한 상황에서 가장 먼저 찾는 119 신고접수 부서이다. 그야말로 화재나 교통사고 등 재난이나 단순한 민원사항을 총망라하는 소방활동의 시작이자 마무리하는 부서라 할 수 있다.

소방공무원은 여러 가지 업무가 있다. 크게는 119를 대표하는 화재진압, 구조구급 등 현장활동과 행정업무만 전담하는 분야가 있다. 행정업무는 화재예방, 건축허가 동의 및 위험물취급허가 등의 민원업무가 있다. 또한 원활한 소방활동이 이루어지도록 지원하는 소방력 관리와 후생, 복지를 담당하는 부서도 있다. 공무원의 업무는 직렬과 보직에 따라 완전히 다른 분야가 많다. 또한 전문 분야는 똑같은 내용의 업무를 평생토록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다소 지겹지 않을까, 타성(惰性)에 젖을 수도 있다는 우려는 노파심일까.

하지만 우리 소방은 어느 직업보다도 더 감동적이고 자극적인 호기심을 유발하는 경우가 많다. 119종합상황실은 급박한 재난 현장은 아니지만 연습이나 실수가 허락되지 않는 소방의 컨트롤타워(Control Tower)이다. 판단이나 출동 지령이 상황에 맞지 않을 때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진다. 적절하고 효율적인 대처는 인명과 재산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고, 부적절한 지시는 현장 대응을 더 어렵게 만든다. 그만큼 계속 앉아있어야 하는 업무 특성상 신체적인 활동은 거의 없고, 정신적인 업무 부하가 상당하다. 그야말로 요즘 자주 회자되는 감정노동의 상위 그룹에 해당된다 할 것이다.

차라리 고되고 힘들어도 몸으로 부딪치는 현장으로 돌아가고자 인사 담당부서에 몇 차례 청을 넣고 기다렸다. 무거운 업무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 싶어 애타던 그때는 일각이 여삼추였다. 원하던 바이지만 부서 이동이 있을 때마다 긴장과 기대감이 동시에 드는 것은 나뿐일까 싶다. 이렇게 하여 119안전센터에서 근무하던 한겨울의 어느 하루로 기억한다.

출동 방송내용으로 짐작하면 대민지원 상황이다. 지령부서인 상황실은 항상 출동 지시에 앞서 119신고 접보 상황을 실시간으로 알려준다. 하지만 신고자는 구체적인 내용이 없이 도와달라는 내용만 반복했다. 정확한 상황은 모르겠지만 다급한 사정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한달음에 달렸다.

동구 신암동 평화시장 뒤쪽 좁은 골목을 돌아 현장을 찾던 중이다. 골목 안쪽에서 얼핏 보아도 건강이 좋지 않아 보이는 아주머니가 손짓하여 우리를 부르고 있었다. 순간 응급환자가 있어 구급대 출동을 해야 하는데 대민지원을 하는 소방차가 온 실수인가 당황했다. 하지만 상황은 이러했다. 신고자는 수개월간 병원에 입원해서 암 수술과 항암치료를 하고 막 퇴원을 한 환자였다. 보호자나 의지할 수 있는 가족이 없이 혼자 사는 상태였다. 특히 휴식과 몸조리를 할 수 있는 따뜻하고 쾌적한 환경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환자였다. 하지만 난방보일러가 고장이 나서 썰렁하고 습기 찬 작은 집에서 몸둘 바를 모르고 있는 것이었다.

평상시 이런 요청을 받으면 직접 관련업체 기사의 서비스를 받으면 된다고 하고 거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눈앞에 서 있는 작은 여성은 너무도 애처롭게 떨고 있었다. 다가올 미래는커녕 단지 몇 분 후의 상황도 예측할 수 없는 암흑 같은 심정을 우리는 느낄 수 있었다.

다양한 형태의 재난이나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고, 비슷한 내용의 출동일지라도 대응이나 조치가 항상 판에 박은 듯 같은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오늘은 그냥 돌아갈 수 없는 특이한 일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어려울 수도 있는 보일러 본체 고장은 아니었다. 직접 배관의 부속을 몇 개 사서 교체를 하고 느슨해진 물 공급장치를 고정해서 훈훈하고 아늑한 집으로 만들었다. 따뜻해진 방을 확인하고 다시 이상이 생기면 연락을 달라는 말을 하고 돌아오려고 하는 순간 "고생하셨습니다"란 말과 함께 이 약하고 작은 여성이 갑자기 서럽게 울기 시작하여 이내 통곡(痛哭)으로 변하였다. 우리는 순간 당황했지만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서러운 시름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이제 돌아가겠다고 다시 인사를 했다. 그제야 신고자는 "내 생애 이렇게 고맙고 따뜻한 배려와 존중을 받아본 일은 처음"이란 말과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 순간 가슴은 먹먹해지고 전신에 알 수 없는 전율이 일어났다. 상황실에서 일할 때는 아무리 잘해도 칭찬보다는 면박이나 질책을, 감사보다는 욕설을 더 많이 들어야 했던 내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런 맛에 소방관을 하지! 나이 더 들기 전에 몸으로 뛰고, 힘들고 어려운 이들에게 감동을 더 주고 느끼자." 그간 상황실에서의 힘들었던 지친 몸과 마음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김진열 대구중부소방서 기동지휘단 소방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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