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허궁열의 알프스 기행] 이탈리아 쿠르마이예 삭스 언덕

佛'伊 국경 만년설 실루엣 '설국 환상'

삭스 언덕에서 한 등산객이 몽블랑에서 동쪽으로 뻗은 국경 능선을 걷고 있다.
삭스 언덕에서 한 등산객이 몽블랑에서 동쪽으로 뻗은 국경 능선을 걷고 있다.
베르토네 산장에서 내려오는 트레커들.
베르토네 산장에서 내려오는 트레커들.

지구상 어느 지역이든 큰 산과 강들은 인간생활의 영역을 자연스럽게 구분시킨다. 알프스 산맥 또한 그러한데, 몽블랑 산군은 유럽의 세 나라를 갈라놓고 있다. 몽블랑 산군 동쪽 끝자락을 자치하고 있는 스위스를 제외하고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알프스 최고봉 몽블랑을 사이에 두고 있다. 몽블랑에서 시작한 3,000~4,000m 높이의 만년설 능선은 그랑드 조라스까지 이어지며 남북을 가르는 국경선을 이룬다. 이렇게 장대한 능선을 지켜볼 수 있는 언덕이 있는데, 이탈리아 쿠르마이예(Courmayeur'1,226m)의 삭스 언덕이다. 이번에는 남쪽에서 몽블랑을 지켜보며 걷기로 한다.

샤모니에서 버스를 이용, 곧장 몽블랑 터널을 지난다. 11.6㎞ 길이의 터널은 1965년 개통되어 두 나라의 교류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1999년 대형사고로 30여 명의 사망자를 내고 재개통되었는데 몽블랑 아래를 관통한다. 이 터널이 없었다면 샤모니에서 쿠르마이예로 가기 위해서는 스위스의 마르티니 계곡을 지나 서너 시간은 돌아가야 한다.

30분이 채 걸리지 않아 이탈리아의 쿠르마이예에 도착한다. 알프스의 겨울은 차고 건조하지만 큰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남쪽 나라의 기후는 훨씬 더 온화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쿠르마이예는 샤모니 못지않은 유명 산악도시지만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마을이다. 열차가 다니지 않아 그러려니 했는데, 몇 해 전 겨울에는 한국의 한 대기업이 이곳에서 대대적인 홍보행사를 한 적도 있다.

산행은 터미널이 있는 시내 중심가에서 시작한다. 30분 정도 시간을 내어 하천 건너에 있는 옛 주택가를 둘러보면 수백 년간 옹기종기 모여 산 산골마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터미널에서 마을 주 거리를 따라 교회 쪽으로 가서 산악박물관 앞 오르막으로 방향을 틀어 몽블랑 일주(TMB) 코스를 따른다. 한동안 주택가를 따라 오른다. 몽블랑이라는 큰 산 하나를 두고 샤모니 쪽과 너무 다른 가옥 형태다. 지붕에 온통 너른 돌을 이고 있는 돌집들이 많다. 20여 분 지나 버드나무가 줄지어 서 있는 오솔길에서 길이 좁아진다. 더 이상 사람들이 살지 않는 지대라 여기서부터 온통 눈밭이다. 다행히 산책한 사람들의 발걸음이 길을 내 놓았다. 만년설이 있는 알파인 지대가 고도를 낮춰 1,000m대의 계곡까지 내려온 분위기다. 온 천지가 하얀 세계 속에서 백설을 쓰고 있는 전나무 숲이 인상적이고 신비하다.

한동안 남측 산비탈의 그늘 속으로 이어지던 길을 지나 오후의 따뜻한 햇살이 비추는 곳으로 나가자 베르토네 산장(Refuge Bertone'1,97

0m)으로 오르는 갈림길이 나타난다. 산장으로 오르는 오솔길도 러셀(눈밭에서 발로 눈을 밟아 다지며 진행하는 것)이 되어 있어 설피를 이용하지 않아도 돼 다행이다. 전나무 숲은 정겹다. 한여름의 짙푸르던 잎들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앙상한 뼈대가 시간의 무게를 느끼게 한다. 알파인 지대의 척박함을 맨몸으로 견디는 억세고 강한 기운이 그대로 전해진다. 도중에 한두 트레커들이 내려간다. 다들 설피를 신고 있고, 그중엔 할아버지도 있다. 쿠르마이예 마을을 발 아래에 두고 지그재그로 전나무 숲으로 이어지던 길은 한 시간 반 만에 나무들이 뜸해지는 지대에 이른다. 눈이 깊어지고 전망이 트이면서 몽블랑의 남동면이 지척으로 다가온다. 언제 보아도 웅장한 모습 그대로다. 알프스에서 히말라야만큼 외진 등반 대상지로 유명한 몽블랑 남벽은 겨울철이라 더 위협적이다. 

위에서 내려오는 세 명의 트레커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베르토네 산장에 이르러 처마 아래 배낭을 내려놓고 쉰다. 베르토네 산장은 겨울에는 위쪽 작은 산장만 연다. 별채의 넓은 유리창 안에서 한겨울의 햇살을 즐기던 60대의 할아버지가 손을 흔든다. 간단히 답례를 하고 삭스 언덕(mont de la Saxe)으로 계속해서 오른다. 산장 위에서부터 얼마간은 경사가 급한 사면이다. 30분 정도 걸려 등에 땀이 솟을 무렵 드넓은 눈밭 언덕 삭스에 올라선다. 쿠르마이예에서 두 시간 정도 걸렸다. 여름에는 초록의 풀밭에 눈처럼 하얀 꽃들이 피어 있는 언덕이다.

이곳에서 마주하는 몽블랑 산군의 풍광이 좋아 종종 찾는데, 몽블랑 동벽 및 페터레이 능선, 당 뒤 제앙과 그랑드 조라스가 훤히 건너다보인다. 알프스 최고봉 몽블랑은 언제 보아도 그 모습 그대로다. 몽블랑을 스승이요 부모처럼 여겼다는 위대한 산악인 보나티처럼 나 또한 몽블랑으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았고 사랑도 받았다. 내 삶의 터전이나 마찬가지라 볼 때마다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이 인다. 언제까지나 저 산을 마주하면서 오르내리고 싶다는 바람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다.

여기서 산행을 계속하려면 트롱께 언덕(testa della Tronche'2,584m)을 거쳐 보나티 산장으로 가면 된다. 3시간 이상 걸리는 코스로 초행인 경우 전문산악인과 함께해야 한다. 삭스 언덕의 설원만으로도 족한데, 1㎞ 정도 동쪽으로 설원 위를 걷고 베르토네 산장으로 돌아오면 겨울산행의 진수를 느낄 수 있다. 바람에 이리저리 쓸려 각양각색의 형태로 형성되어 있는 눈밭이 햇볕에 한층 살아난다. 그 위에 선을 긋는 인간의 걸음이 무지막지해 보이지만 쾌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얼음사막을 휘젓는 정복자의 횡보다. 현대 생활에서 쉽게 느낄 수 없는 자유와 쾌감을 무한히 펼쳐진 설원에서 마음껏 누리며 걷고 또 걷는다. 자연을 정복하고 파괴하면서 얻는 탐욕과 욕구불만의 충족과는 다르다. 어떤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대자연을 홀로 걸으면서 어느새 자연과 동화되는 그 가득한 즐거움을 어찌 외면하랴.

[Tip] 산행정보=이탈리아의 쿠르마이예는 제네바 공항에서 샤모니를 경유하거나 밀라노에서 3시간 이상 버스를 타면 된다. 샤모니~쿠르마이예 간 버스는 성수기에는 하루 여섯 번 운행하며 편도 요금은 17유로다. 겨울에 이 코스를 트레킹하기 위해서는 설피가 필요하다. 쿠르마이예나 샤모니의 모든 장비점에서 대여 가능하다. 당일 산행도 가능하지만 베르토네 산장을 이용해 알프스의 겨울밤을 지내보는 체험도 놓치기 아깝다. 2,000m 지대의 겨울은 생각보다 춥기에 충분한 방한 장비를 갖춰야 한다. 트레킹 코스는 생각보다 눈이 깊고 몇몇 가파른 구간이 있으니 경험자와 동행하는 게 바람직하며 지도 등을 참조해 산행코스를 잘 확인해야 한다. 보나티 산장에서 내려가는 발 페레 계곡에서는 겨울철에 버스가 그랑드 조라스 남면 아래 네이콘(Neycon) 마을 어귀까지만 다닌다. 라 파루드(la Palud)에서 쿠르마이예행 버스를 갈아타야 한다. 버스 요금은 1인 1.8유로.

알프스 전문 산악인 vallo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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