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최세정의 대구, 여성을 이야기하다] 대구의 근대 기생들

시·서화·가무 두루 능했던 예술인들 일제에 의해 왜곡된 이미지 복원해야

"대구의 기생들에 대해 소개하려다가 한 시민이 크게 화낸 적이 있어요. 기생까지 대구 근대 인물이냐면서 말이죠."

한 문화해설사의 이 말은 기생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기생은 작부, 창녀, 팜므 파탈, 예인 등 다양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그들의 존재를 다 담아내기에는 마땅한 그릇이 아닌 것 같다.

대구의 기생은 1895년 경상감영이 사라지면서부터 그 운명이 위태해졌다. 당시 경상감영에는 관기를 관장하던 교방이 있었고, 이곳에서 체계적인 교육이 이루어졌다. 감영의 관기들은 시와 가무, 서화 등에 능했고 이들의 자부심도 대단했다. 하지만 일제에 의해 1909년 관기제도가 폐지되자, 기생들이 갈 곳이 없어졌다. 일제는 1909년 속칭 자갈마당 자리에 대구 유곽지를 조성했다. 여기에는 기생을 천시하고 성 노리개로 삼으려는 일제의 의도가 숨어 있다. 이런 시대적 흐름 속에서 대구기생조합이 탄생했고, 이는 대구권번, 그리고 달성권번으로 바뀐다. 체계적인 교육을 받고 전통문화를 이어온 실질적인 문화 아이콘이었던 관기는 일제를 거치면서 그 이미지가 왜곡된다. 그 잔재들이 지금껏 남아 있는 것이다.

대구 종로의 요정 '가미'에 가면 기생에 관한 이야기들이 스토리텔링화되어 있다. 1980년대까지 이어지던 요정 시대가 저물었지만 아직도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요정 가미는 1962년 가정집을 개조해 '식도원'이라는 요정으로 시작했으며, 1986년부터 가미로 이름을 변경했다.

가미에 들어서면,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 대구에서 이름을 떨쳤던 130여 개 요정의 미니어처가 전시되고 있다. 대구의 100년 요정 역사를 한눈에 알 수 있게 정리한 것이다. 그 외에도 가미 곳곳 미로처럼 연결된 길을 따라가노라면, 기생에 관한 귀한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유물들은 요정의 역사가 가볍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요정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기생과 만난다. 1909년 관기제도가 폐지되자, 기생들은 생업을 위해 대구기생조합을 설립해 요릿집으로 나가 예악(禮樂)을 팔았다. 1960년대 요릿집과 권번의 역할을 합한 본격적인 요정 시대가 열린 것이다.

대구에 특히 요정이 많았는데, 그것은 일제와 관련이 있다. 경부철도가 건설되면서 일본인들이 몰려 왔고, 이들을 겨냥한 요릿집이 문을 연 것이다. 최고 절정기에는 130~150개를 넘어섰다고 하니, 그 규모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가미가 자리 잡고 있는 대구 종로에만도 최고 전성기에는 기생 숫자가 5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대부분 춤과 노래 실력이 뛰어났지만 몸은 팔지 않는 1급 기생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고고한 태도로 기생의 마지막 명맥을 이어온 것이다.

전후 근대화 시기 대구 도심을 물들였던 요정과 기생 이야기를 자원화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그 이전 기생의 의미가 어떻게 변질되었는지 살펴보는 것도 필요하다. 일제에 의해 왜곡된 기생의 역사를 다시 복원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최세정(대구여성가족재단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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