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독도 강치

'바닷속에 큰 짐승이 있다. 소모양에다 눈동자는 붉고 꼬리는 없다. 해안에 떼를 지어 누워 있다가 많은 사람을 만나면 달아나 물속으로 들어가는데 이름을 '가지'라 한다'. 신경준(1712~1781)이 편찬한 '동국문헌비고 여지고'에 나오는 가지에 관한 기록이다.

우리 조상들이 가지에 대해 남긴 기록은 다양하다. 여기서 가지란 바다사자의 일종인 강치를 일컫는다. 지금은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독도 강치를 두고 울릉도 사람들은 가지 또는 가제로 불렀다. 강치가 흔한 독도는 가지도였다. 동해는 강치 천국이었다. 19세기 동해엔 독도를 중심으로 3만~5만 마리의 강치가 살았다.

이런 독도 강치에 눈독을 들인 것이 일본인 나카이 요사부로였다.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해삼을 잡으며 살다 1903년 독도에 강치가 많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리곤 강치를 잡기로 한다. 당시 독도엔 이미 조선인 경쟁자가 많았다. 조선인들이 독도에서 강치를 잡아 매년 가죽 800관을 일본에 수출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나카이는 독도 강치를 탐냈다. 그렇지만 독도는 명백한 조선령이었다.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그린 해도는 많았지만 이를 일본령이라 그린 지도는 없었다.

이를 알게 된 나카이는 어업을 독점할 수 있도록 독도를 아예 일본 영토로 편입해 달라는 '청원서'를 일본 정부에 냈다. 일본 정부 역시 독도에 눈독을 들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무주지 선점론이란 명분을 만들어 슬그머니 독도를 시마네현에 집어넣었다. 그 대가로 나카이는 강치잡이를 독차지했다.

그의 강치 사냥은 무자비했다. 오키도청에 제출한 강치잡이 신고서에 따르면 독도 편입 첫해인 1905년 2천750두를 시작으로 매년 1천~3천 마리씩 강치를 잡았다. 남획으로 1935년쯤에는 매년 20~50마리 수준까지 줄었다. 해방 후 독도에 남은 강치는 300여 마리에 불과했다. 일본의 우리나라 영토 침략의 시작은 독도였고, 그 첫 희생자는 강치였다.

서경덕 교수가 지난주 '독도 뉴스-사라진 강치의 진실'편을 유튜브에 올렸다. 독도에서 왜 강치가 사라졌는지를 알리는 영상이다. 같은 날 일본이 정한 다케시마의 날을 비난하는 시위도 뉴스를 탔다. 하지만 정작 우리 땅 독도를 지키는 것은 시위가 아니라 역사적 사료다. 우리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차근차근 사료를 발굴해 정리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독도를 지키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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