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건대 평론은 가장 흥미로운 예술 장르 중 하나다. 그런데 보통은 예술보다 더 다가가기 어려운 분야로 불리기도 한다. 여기에는 태생으로부터 비롯된 약간의 오해가 섞여 있다. 애초부터 평론은 이론으로 이루어진 장르였다. 미술과 음악이 각각 형상과 소리로 이루어진 것과 마찬가지다. 문제는 이론이 형상이나 소리보다 덜 친숙하게 다가온다는 데 있다.
최근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면서 이를 공부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가 많아졌다. 하지만 인문학이 진정한 공부의 대상인지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그것은 학문이기 이전에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관심이기 때문이다. 즉 자연스러운 삶의 태도이자 고민인 셈이다. 이를 부러 공부한다고 하는 말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이론이 우리에게 덜 친숙한 대상으로 자리한 이유 역시 이러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이론이란 결국 생각의 다른 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과연 생각은 형상이나 소리보다 우리에게 먼 대상인가.
이론의 거리감에는 두려움이라는 부분도 있다. 해석의 두려움이다. 대부분의 이론은 생각에 생각의 꼬리를 문 형태로 펼쳐진다. 익숙해지지 않거나 부지런히 읽지 않으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내용을 대하게 된다. 나 역시 그러한 경우가 적지 않다. 이해하기보다 넘겨짚는 경우가 더 많을 때도 있다.
그 대상이 평론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평론을 읽으면서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낯선 회화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클래식 연주를 감상하며 졸음이 밀려오는 것과도 같은 이치다. 그것들에 대한 개개인의 감흥 역시 제각각이다. 물론 보다 깊게 이해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이해보다 더 중요한 감상법은 각자의 감흥에 충실히 따르는 것이다. 감상의 대상이 예술이라면 말이다.
모든 그림이나 음악이 난해하게 다가오지는 않듯 모든 평론이나 혹은 평론의 문장들이 난해한 것은 아니다. 정확하게 이해하더라도 별 감흥이 없는 평론이 있는 반면, 넘겨짚어도 가슴을 설레게 하는 평론이 있다. 다시 말해 좋은 평론의 기준은 좋은 예술의 기준과 다르지 않다. 또한 한 가지는 분명하다. 모든 평론가들은 가장 정확한 말과 이론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한다. 가장 정확한 표현을 위해 애쓰는 예술가들인 셈이다.
물론 평론은 예술 작품에 대한 비평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창작의 소산임에도 창작으로서의 예술과 구분되는 경우가 있다. 사실 창작된 예술 작품 역시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는데, 예술에 있어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말이 통용되는 이유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오히려 비언어적이고 이론적이지 않은 작품들을 언어로 체계화시키고 재탄생시킨다는 점은 평론이 과학적인 예술로 불리는 까닭이기도 하다.
이승욱 월간 대구문화 취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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