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3·1절 잊지 않아요, 위안부] 소녀의 한쪽 어깨 맞대어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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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 같지?\\" 18세 이용수가 그려진 그림을 88세 이용수 할머니가 들어 보이며 말했다. 누구라도 꽃다운 나이는 그리운 법이지만 할머니의 꽃답던 시절은 손에 쥔 모래알처럼 흘러가버렸다. 김의정 기자

소녀상의 왼쪽 어깨에는 작은 새 한 마리가 앉아있습니다. 하늘과 땅을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새. 이 새에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과거와 현재 아픔을 담고 있습니다. 꽃다운 나이에 새처럼 날지 못했던 안타까움과 이제는 새처럼 날아 꽃다운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할머니들의 현재 소망을 의미하지 않을까요.

소녀상의 다른 한쪽 어깨가 왠지 허전해 보입니다. 어딘가 기댈 곳을 찾는 듯합니다. 다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위로하는 마음이야 크지만 직접 행동으로 나서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기꺼이 한쪽 어깨를 맞대어 드리겠다고 행동으로 나선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용수(87) 할머니는 당시 위안부 현실을 알리려고 20여 년째 아픈 기억을 끄집어내고 있습니다. 조정래(41) 감독은 많은 사람들이 위안부 피해에 공감하도록 위안부 문제를 담은 영화 '귀향'을 제작했습니다. 이 밖에도 지역의 젊은 건축가 4명은 할머니들의 아픔을 담은 공간을 만드는 데 힘을 모았고 효성여고 역사동아리 학생들은 4년째 위안부 문제를 알리려 발벗고 나섰습니다. 소녀상의 한쪽 어깨가 쉴 수 있는 따뜻한 이야기들입니다. 광복 70주년이지만 할머니들의 상처는 역사 속에, 그리고 현재에도 또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소녀상의 어깨처럼 이제 할머니들의 아픔도 어딘가에 기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김의정 기자 @msnet.co.kr

◇"가을밤, 잠결에 끌려간 게 타이완 어느 부대…"

대구경북 출신 이용수 할머니가 들려준 증언

대구경북에는 현재 6명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가 있다. 이용수 할머니는 그 중 가장 젊다. 1992년부터 위안부 문제를 알리고자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일본군의 만행을 증언해오고 있다. 24일 대구 달서구 상인동에서 이 할머니를 만났다. 긴 시간 할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할머니의 독백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나는 왜, 어디로 가고 있나'

1943년 어느 가을날. 조금은 쌀쌀했지만 불어오는 바람이 기분 좋은 밤이었어.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는데 잠든 사이 누가 봉창에서 나를 깨웠어. 잠깐 나와보라고. 엄마는 막내동생 젖 먹이러 방에 들어가 있어서 밖에는 나 혼자뿐이었지. 밖에 서 있던 사람은 여자 하나, 남자 하나였는데 여자가 한 손은 내 어깨에 손을 얹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입을 막았어. 자세히 보니 남자가 여자 등허리에 뭔가로 찌르면서 그렇게 하도록 시킨 모양이더라고. 열여섯 살이던 나는 그때부터 아무것도 모른 채 밤중에 끌려갔어.

밖에 나가보니 나 말고 네 명의 언니들이 떨고 있었어. 나보다 한두 살씩 더 많았을 거야. 우리는 차를 타고 경주, 평양으로 끌려갔다가 중국 다롄(大連)이라는 곳에 왔지. 일본 군인 300명과 아주 큰 배를 탔어. 나는 무서워서 안 타겠다고 했지만 같이 간 언니들이 말했어. "이걸 타야 엄마한테 빨리 간다"고.

하루는 일본 설날이래. 배에서 설날을 맞은 거지. 군인이 나한테 노래를 시켰어. 나는 내가 생각해도 똑똑한 아이였어. 국민학교를 4학년까지 다녔어. "여자애 공부시키면 안 된다"는 동네 사람들의 말에 학교를 그만둬야 했지만 그 뒤에도 동네에 있던 야학에 나갔지. 거기서도 나는 반장을 할 정도로 당차고 똑똑했지. 일본어로 된 노래를 한 번 들으면 안 잊어버릴 만큼 기억력이 좋았어. 기억나는 노래를 배 안에서 불렀어. 찹쌀떡 하나를 받았던 기억이 나.

배는 엄청나게 커서 이동하는지 모를 정도였어. 하루는 배가 사고 났나 봐.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흔들려 뱃멀미를 심하게 했어. 배가 흔들리니 머리가 아팠고 속이 메스꺼웠어. 화장실에서 토하고 기다시피 나가려는데 눈높이에서 군인 발이 보였어. 위를 올려다보니 일본 군인 한 명이 나오지 못하게 막고 있었어. 잡고 일어서려는데 군인이 또 못 나가게 했어. 군인의 팔을 힘껏 물었던 기억이 나. 군인은 내 뺨을 때렸어. 그 뒤로는 기억을 잃었는데 함께 온 언니들이 나를 담요로 덮어 "죽은 것처럼 눈 감고 있어라"고 했어. 실눈을 뜨고 담요 밖을 봤더니 군인들이 언니들한테 달려들고 있었어. 그리고 또 정신을 잃었어.

◆"아직도 괴로움에 소리치던 내 목소리가 들려"

배는 어디엔가 정착했고 우리는 기진맥진한 상태로 배에서 내렸어.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있었던 데가 타이완 신죽(新竹)의 가미카제 부대래. 그곳에는 삼각형 지붕으로 된 기와집이 있었어. 기와집 안을 보니 오른쪽 공간에는 기모노를 입은 언니 10명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고 왼편에는 다섯 개의 방이 있었어. 기모노 입은 언니 한 명이 "너는 너무 어리다. 내가 감춰줄게" 해서 따라간 곳이 벽장 안이었어. 벽장 안은 너무 좁아 문을 꼭 붙잡고 있었는데 얼마 후에 일본군 한 명이 오더니 몽둥이로 나를 숨긴 언니를 때리기 시작했어. "조센진 여자애 어디에 숨겼냐"며 칼로 언니 옷을 찢었어. 나는 너무 놀라 문 밖으로 쏟아지듯 넘어졌어. 언니는 피범벅이 된 얼굴로 "저 사람 말 안 들으면 죽는다"고 했어.

어느 날엔 군인이 나에게 어떤 방으로 들어가라 했어. 방을 들여다보니 군인 한 명이 있었어.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지. 그랬더니 군인은 나를 끌고 자물쇠가 잠겨 있던 큰 방으로 데려갔어. 문을 열자마자 나를 발로 찼는데 너무 아파서 두 손으로 빌었어. 군인은 사정없이 나를 발로 차고는 테이블 위에 내 양손을 줄로 묶었어. 군인이 뭔가를 작동하니 내 의지와는 다르게 몸이 저절로 떨렸어. 그때 "엄마!"하고 크게 소리친 게 적막한 가운데 귀뚜라미 울듯 머리에서 울리고 있어. 뭔지 모르는 기계를 그 일본 군인은 또 돌렸어.

끔찍한 나날이 눈앞에서 계속됐어. 폭격에 집이 무너지기도 하고 임신한 친구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모습을 두 눈으로 봐야 했어. 배를 타야 엄마한테 간다던 말을 원망하고 또 원망했어.

어느 날 한 남자가 다가와서 손으로 엑스(X)를 그리며 말했어. "전쟁이 이렇게 됐다"고. 남자는 우리를 수용소로 데리고 갔어. 배를 다시 타야 한대. 나는 안 타겠다고 그랬지. 배를 타면 또 무서운 곳에 갈 것 같으니까. 근데 이번에는 언니들이 "배를 안 타면 여기서 죽는다"고 했어. 배를 타고 도착한 곳은 부산이었어. 부산에 내려 기차를 타고 대구로 갔지.

돌아온 동네는 그대로였어. 모든 게 반가웠지. 심지어 정신질환을 앓던 여자, '금달래'까지도. 전에는 근처에 가기도 무서운 여자였는데 그 여자를 "금달래야"라 부르면서 와락 끌어안았어. 금달래에게 머리채를 잡혔지만 아픈 줄도 몰랐지.

꿈에 그리던 집에 갔지만 가족들의 반응은 꿈속 모습과는 달랐어. 아버지는 나를 보자마자 뒤로 넘어갔고 엄마는 동생에게 "너희 누나 영혼이 왔다"며 제사지낼 두부를 사오라고 했어. 엄마를 안았어. 엄마는 "귀신아 저리 가라"고 소리치며 까무러쳤어. 한 동안을 뒷방에 세 들어 살던 처자와 같이 지내야 했어.

그 뒤로도 귀신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았어. 또 잡으러 올 것 같고 무서워서 밖을 제대로 다니지도 못했고 얼굴을 들고 다닐 수도 없었어. 살아 있어도 없는 듯 지낸 거지. 몸은 계속 아팠어. 산으로 다니며 아무 풀이나 뜯어 먹었어. 아픈 몸이 빨리 낫고 싶어서. 그렇게 평생을 밖으로는 세상을 무서워하고, 안으로는 아픈 몸을 안고 살았어.

◆전쟁, 그러나 평화적으로 해결됐으면

"일본에 붙들려갔던 사람들 동사무소 와서 말하라." 64살이 되던 때, 귀가 솔깃할 이야기가 들려왔어. 그렇지만 나는 아닌 줄 알았어. 나는 그때까지 '내가 나쁜 애라서' 잡혀간 건 줄 알았거든. 한 경찰관이 가보라 했지만 손사래를 쳤어.

우연히 신문을 읽다 몇몇 단어가 눈에 들어왔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라는 단체, '빨간 기와집'이라는 소설. 혹시 내 이야기인가. 신문사를 몇 번이고 찾아갔는데 무서워서 매번 발길을 돌렸어. 내일은 꼭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날 새벽, 동생이 교통사고로 응급실에 있다는 전화를 받았어. 죽음의 문턱에 선 동생에게 털어놨어. "누나 그때 일본놈한테 붙잡혀 간 거였데이." 동생은 나한테 "누나 이야기 하이소"라 말하고는 세상을 떠났어.

동생 죽음 앞에 마음이 담담해졌어. 신문사에 가서 "나는 용수 친구인데. 용수가 말해 달라고 해서 왔다"며 그동안의 이야기를 털어놨어. 그 뒤 정대협을 알게 됐고 닷새 뒤 모임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갔어. 서울 한 교회에는 서른 명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모두 내 또래였어. 나와는 다른 듯, 같아 보였어.

나는 역사의 산증인으로 다시 태어났어. 똘똘했던 어릴 적 모습도 되찾았고. 50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지. 1992년부터 위안부 문제를 국제적으로 알리려고 서울 일본대사관과 도쿄, 워싱턴까지 다니며 일본군의 만행을 증언해 왔어. 아직도 옛날이야기를 하는 건 무섭고 힘들어. 몸도 예전 같지 않고. 이 아픔이 남아 있는 한, 죄는 사라지지 않아. 전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야. 다만 평화적인 방법이어야지. 지금도 이 전쟁을 그만 하고 싶은 마음이 크지만 일본 정부의 사과를 받아내는 순간을 보려고 아직 힘이 남아있는 것 같아.

김의정 기자 ejkim90@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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