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사각 가는 모래 벼랑에
사각사각 가는 모래 벼랑에
구운 밤 닷 되를 심습니다.
그 밤이 움이 돋아 싹이 나야만
그 밤이 움이 돋아 싹이 나야만
유덕하신 님을 여의고 싶습니다.
이것은 고등학교 때 누구나 한 번은 배웠던 고려가요 '정석가'의 일부분이다. 도저히 식물이 자랄 수 없는 모래 벼랑에, 그냥 밤도 아닌 구운 밤을 심으면 싹이 날 리가 없다. 그런데 화자는 그런 일이 일어나면 님과 이별하고 싶다고 이야기를 한다. 이 말은 구운 밤에서 싹이 날 리가 없으니까 님과 이별할 일도 없다, 즉 님과 이별하기 싫다는 것을 강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선인들의 글에서는 불가능한 상황에 대한 설정을 통해 자신이 소망하는 바를 재치 있게 드러내는 표현을 자주 볼 수 있다.
우리 선인들의 재치와 멋을 볼 수 있었던 가정적 표현은 오늘날 정치인들이나 언론인들의 경우에는 상황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요리하는 데 많이 사용한다. 정당의 대변인들은 상대 당에 대한 확인되지 않은 의혹이 있을 때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경악을 금치 못할 국기문란 행위이며, ○○당은 자진해서 해체하는 것이 올바른 길이다"와 같은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사실이라면'이라는 가정하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온갖 욕을 하지만,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만약 사실이 아니라면 뒷부분에 오는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이 된다. 그렇지만 정치인들은 그런 가능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고 언론인들은 대변인의 말 중 일부분만 따서 '경악을 금치 못할 국기문란 행위!'와 같은 제목으로 기사를 내보낸다.
얼마 전 이와 관련된 아주 희극적인 상황이 있었다. 문재인 의원은 야당 대표로 취임하면서 "정부가 민주주의와 서민 경제를 계속 파탄 낸다면 전면전을 시작할 것이다"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다음 날 신문들에서는 일제히 '문재인, 정부와 전면전 선포!'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냈다. 그리고 여당 의원들도 이 발언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거나 사과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논리적으로 보면 여당 의원들의 반응은 정부를 보호하는 것처럼 하면서 지능적으로 정부를 비판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야당 대표의 '전면전'은 '정부가 민주주의와 서민 경제를 계속 파탄 낼 때'에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만약 정부가 민주주의와 서민 경제를 파탄 내지 않는다면 야당이 전면전을 치를 일도 없다. 결국 여당 의원들이 야당 대표의 '전면전' 발언을 문제 삼는 것은 정부가 민주주의와 서민 경제를 파탄 내는 것을 기정사실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정치인들이 말하는 것을 따르면 '~한다면'의 형태로 제시되는 가정이 기정사실화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어떤 새로운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기존의 확정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하는데, 이것을 전제라고 한다. 예를 들어 "너는 오늘도 또 지각이구나"라는 말이 성립하려면 '너'가 그전에도 지각을 했다는 것이 분명히 있어야 한다. 일상에서 많이 쓰는 '전제 조건'이라는 말이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 반드시 갖추어져야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여당 국회의원들이나 보수적인 언론에서 야당 대표의 말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부분은 야당 대표가 현재 상황을 '민주주의와 서민 경제를 파탄 내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부분을 지적하지 않고 전제와 가정을 혼동함으로써 엉뚱하게 자살골을 넣은 꼴이 되고 말았다.
능인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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