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여행지 하이랜드가 삶의 밑바닥을 관조해 볼 수 있는 원초적인 허무의 자연이었다면 '호수지방'(Lake District)은 더도 덜함도 없는 문자 그대로 낭만의 산천이다. 나무 한 그루 돌 하나 구릉 하나 없이 풀만 곱게 덮인 정말 어디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문자 그대로의 민둥산부터, 그 아래에 나지막하게 엎드린 크고 작은 호수 그리고 그 사이에 비집고 들어선 오래된 돌집들이 이룬 작은 마을들. 제대로 그림이 그려지는가? 영국인들은 그래서 '호수지방'이라고 써 놓고 '낭만'이라고 읽는다.
영국 잉글랜드 서북부 200㎢에 펼쳐진 영국 국립공원 제1호인 호수지방은 어디를 가나 정말 영국인들이 호호 불어 애지중지하면서 보호한다는 느낌이 든다. 어디서고 공장 비슷한 것조차 보이지 않고, 관광 휴양지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들어선 대형 호텔도 언감생심이다. 호수지방 가장 중심 마을 윈더미어(Windermer
e)에나 시멘트로 지은 호텔이 한두 개 마지못해 들어서 있는 듯이 숨어 있다. 그마저도 3, 4층에 불과하다. 호수지방 마을의 인가는 거의 다 돌집이다. 주로 민박으로 많이 사용하는 이런 집들은 지은 뒤 한 번도 손을 대지 않은 듯한 바깥과는 달리 안은 현대적인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집 안의 벽, 천장, 기둥이나 바닥 같은 구조적인 부분은 전혀 바뀐 것이 없다. 가구나 집기들도 모두 세월의 때가 묻은 것들로만 채워져 있다. 수백 년 전의 집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들어도 이상하지 않다. 이들은 그렇게 산다.
호수지방은 연간 1천600만 명의 관광객이 다녀가는데도 그냥 이렇게 옛날처럼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왜? 바로 이런 것을 보려고 사람들이 온다는 점을 간파한 것이다. 항공기 발달로 해외여행이 일반화되기 전에도 호수지방은 영국인에게 최고의 휴양지였지만 지금도 그때 못지않다. 호수지방을 찾는 대다수의 관광객은 놀랍게도 영국인들이다. 그래서 '영국적인 인성을 가지지 않으면 크리켓(Cricket)과 호수지방을 좋아할 수가 없다'는 말도 있다. 하긴 런던에서 승용차로 한 번도 쉬지 않고 와도 5시간이 걸리니, 명승지들로 점만 찍고 가는 보따리 관광객은 엄두도 못 낼 곳이다. 무슨 대단한 유적지가 있는 곳도 아니고 그냥 산, 호수, 벌판, 숲, 나무들만이 있을 뿐이라 정말 호수지방을 알고 사랑하는 사람들만 온다.
호수지방을 특히 사랑한 사람들은 작가들이었다. 특히 '낭만파' 혹은 '호수파 시인'이라고 불리던 일련의 시인들이 지금도 세계인들로부터 사랑받는 애송시를 여기서 쓰고 활동했다. 빅토리아 낭만파 3대 시인 퍼시 셸리, 존 키츠, 로드 바이런 등을 비롯해 영문학도라면 반드시 지나치지 못하는 사무엘 콜리지, 로버트 사우디가 바로 그들이다. 그래서 호수지방을 일러 '영국의 문향(文鄕)'이라고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윌리엄 워즈워스는 이곳의 '치명적인 매력' 때문에 평생을 떠나지 않고 살았다. 윈드미어 호숫가 마을인 그라스미어의 도브 코티지 돌집에서는 9년간이나 살았다. 여기서 워즈워스는 '하늘에 걸린 무지개를 바라보면 내 가슴은 뛴다'라고 시작하는 시 '내 가슴은 뛴다' 일명 '무지개'와 "저 계곡과 언덕 위를 높이 떠도는/ 한 점의 구름처럼/ 나는 그렇게 외로이 방황했었네"의 '수선화'를 지었다.
동화 '피터 래빗'(Peter Rabbit)의 작가 베아트릭스 포터의 집 '힐톱 하우스'도 차로 불과 20분 거리에 있다. 만일 피터 래빗을 안 읽었다면 여기를 가 본 뒤 동화를 읽어 보길 권한다. 인생에는 특히 놓쳐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는데 피터 래빗이 바로 그런 작품이다. 특히 공부에 지친 아이들에게도 반드시 읽혀라. 힐톱 하우스는 미리 입장권을 예약해야 한다. 400년이 된 나무집에 한꺼번에 들어오지 못하게 관람 시간을 정해 놓아서 그냥 가면 한두 시간은 그냥 기다려야 한다.
호수지방은 어디로 해서 어디로 가라고 코스를 짜지 않겠다. 어디를 가도 모든 길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길을 가다가 큰길로 빠지거나 산을 벗어나는 느낌이 들면 돌아서 다시 들어오면 된다. 그렇게 호수지방 안을 뱅글뱅글 돌다가 때가 되면 호숫가나 길가의 고색창연한 돌집 펍에서 늦은 점심을 여유롭게 즐겨라. 특히 A591, A593, A5084, A590, A592, A5074 도로와 그보다 더 좁은 산길 B5289, B5292, B5322, B5343은 정말 진짜 호수지방의 매력이 철철 넘쳐서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헤매게 된다.
그러나 욕심을 조금만 더 부리면 일정에서 하루를 빼서 산에 오르라고 권한다. 산이 높아 보여도 해발 1,000m 이하여서 좀 단련된 다리라면 큰 무리가 없다. 런던에서 1박 2일로 조금 무리하면 아쉬운 듯 다녀올 수 있지만 이런 욕심을 부리면 2박 3일로도 좀 모자란다. 그러나 산 위에서 보는 호수지방을 누리지 않고는 호수지방을 보았다고 하지 말라는 내 말을 올라본 사람들만 이해한다. 백문불여일견이란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다음 회에는 영국인들에게 가장 이국적인 풍물을 느끼게 하는 여유와 안정의 땅 콘월지방으로 간다.
재영 칼럼니스트'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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