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세없는 복지' 믿는 국민 많지 않아
대통령 계속 강변하는 모습 안쓰러워
지금부터 어떻게 증세할지 고민해야
당초 잘못 세워진 원칙은 빨리 버려야
지난 대선 때 필자는 안철수 후보 캠프에 참여했다. 역할은 부동산 정책 공약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때 부동산팀이 만들었던 공약 중에는 종합부동산세를 복원'정상화하여 과세 형평성을 실현하고, 추가 세수로 70세 이상 노인들에게 10만원씩(자산과 소득에 관계없이) 노인수당을 지급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부동산 과다 보유자에게 높은 세금을 부과하여 불로소득을 환수하고 그 재원으로 취약 계층에게 보편복지를 시행하자는 것이었으니, 이론과 시대정신에 부합할 뿐 아니라 실현 가능성도 큰 공약이었다.
유감스럽게도 그 공약은 내부검토 과정을 통과하지 못한 채 사장되고 말았다. 반대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증세, 특히 종부세 증세 이야기를 꺼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노인 모두에게 10만원씩 지급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 더 강하게 밀어붙여서 공약으로 채택되게 할 걸 그랬다는 후회가 남는다. 그래 봤자 후보가 사퇴했으니 실제 정책으로 시행될 수는 없었겠지만, 정당하면서도 확실한 재원을 기반으로 한 보편복지 정책의 모델이 세간에 알려졌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선거 후반에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박근혜 후보 측이 우리가 만들었던 것보다 훨씬 급진적인 노인연금 공약을 발표한 것이다. 65세 이상 노인 '모두'에게 20만원씩 기초연금을 지급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박근혜 후보에 대한 노인들의 지지가 높았는데, 이 공약까지 발표되자 장년층과 노년층의 지지 열기는 하늘을 찔렀고 이런 분위기는 대선 당일 박 후보를 향한 몰표로 이어졌다.
주지하다시피 그 공약은 공약(空約)으로 끝나고 말았다. 집권 후 박근혜정부는 65세 이상 노인 '모두'가 아니라 소득 하위 70%로 대상을 제한했을 뿐만 아니라, 가장 가난한 기초생활보장 수급 노인 40만 명에 대해서는 기존의 생계급여를 삭감하여 사실상 기초연금 수혜 대상에서 배제하는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약속을 어겼다고 욕을 먹을 게 뻔한데 왜 그랬을까? 이유는 단 한 가지, 돈이 없어서다. 선거 승리에 급급하여 무책임한 공약을 발표했다가 집권 후에 공약을 수정하면서 스타일 구긴 대표적인 사례다. 복지정책의 성패는 재원 확보에 달려 있다. 효과적이고 정당한 재원 확보 방안을 제시하지 않은 채 복지를 확충하겠다고 공약하는 정치인은 모두 거짓말쟁이다.
최근 정치권에서 박근혜정부의 '증세 없는 복지' 정책을 둘러싸고 공방이 치열하다. 자연히 재원조달 방안이 핵심 쟁점으로 부각되었는데, 비과세'감면 정비, 지하경제 양성화, 세출 구조조정 등 증세 외의 방법으로 복지재원을 확보한다는 것이 대통령의 일관된 생각이다.
하지만 재정 전문가와 경제 관료들은 이 방법이 실현 가능성이 없음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대통령의 생각을 바꿀 수는 없고 어떻게든 재원은 마련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관료들이 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증세인 듯, 증세 아닌, 증세 같은 방안'을 활용하는 것 아니겠는가? 담뱃값 인상, 소득세 증수(增收), 주민세'자동차세 인상 검토 등이 이뤄진 배경에는 이런 사정이 있었다고 믿는다. 얼마 전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유승민 원내대표가 '감히' 대통령에 맞서서 '증세 없는 복지는 불가능하다'는 발언을 내뱉은 데는 관가에 이런 분위기가 팽배했음을 방증한다. 문제는 대통령의 고집과 경제 관료의 꼼수가 합쳐져서 증세 중에 최악의 증세(서민 증세, 근로소득자 증세)를 펼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점이다.
저성장-고실업 현상이 고착화되는 상황에서 복지수요는 계속 증가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정부 규모를 줄이지 않는 한 증세는 불가피하다. 이제 '증세 없는 복지'가 가능하다고 믿는 국민도 별로 없다. 실제로 증세가 이뤄지고 있는데도, 대통령은 '증세는 국민을 배신하는 것'이라고 강변하는 모습은 보기에 안쓰럽다.
박근혜 대통령께 권면한다. 이제 그만 고집을 부리시라. 지금부터는 어떻게 증세하는 것이 효과적이고 공평할지에 대해 고민하시라. 원칙을 무너뜨리는 것 같아서 꺼림칙할지 모른다. 하지만 애초에 잘못 세워진 원칙은 꼼수로 지키는 것보다는 빨리 폐기하는 편이 낫다.
전강수/대구가톨릭대 교수·경제금융부동산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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