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독자참여마당] 수필-미영 베

# 미영 베

우리 고향 경주에서는 무명베를 '미영 베'라 한다. 그 목화(木花)씨도 '미영 씨'라고 한다. 목화가 피기 전 푸른 껍질 속에 있을 때 어린 우리들은 목화밭에 들어가서 그 푸르고 맑은 '다래'를 따 먹는다. 다래를 따 먹으면 입안에 달착지근한 물이 잔뜩 고이면서 생길락 말락 하는 섬유질이 씹히는 것 또한 어린 우리들의 허기진 배를 달래고도 남을 정도이므로 자꾸만 따 먹게 된다. 이때 목화밭 주인은 그것이 꽃이 피어야 목화가 되고, 바로 솜이 나올 텐데 피기도 전에 새파란 청다래를 어린 우리가 맛있다고 다 따먹어 버리니까 이제 목화밭을 지키게 된 것이다.

목화는 당시 우리 집에서도 많이 재배하였다. 재배하는 것은 바로 미영 베가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여러 자식과 머슴 셋의 옷감도 수월치 않았다. 모두 철따라 옷을 지어 주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목화씨를 구해서 밭에다 뿌리고 목화를 키웠다. 목화밭은 비교적 집 가까이서 재배하여야 들며 날며 관찰도 하고, 그래야 지키기가 좋다. 목화가 피기 전에는 잎이 넓은 초록빛 바다 같다가, 이제 더욱 자라면 다래가 열리는 열매바다가 된다. 목화가 피면 흰 꽃이 피어서 더욱 보기 좋다. 처음 필 때는 흰 꽃으로 피었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진한 분홍빛을 띤다. 어릴 때 미술 시간에 손을 살살 간지럽히던 습자지(習字紙) 같은 느낌이랄까? 함부로 다룰 수 없는 하늘거림과 화려함이 여전히 나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꽃이다. 흰색일 때는 별로 눈여겨보지 않고 있다가, 붉게 물들면 그 빛나는 꽃의 생명에서 눈과 마음을 사로잡히게 되어 사랑이 싹튼다.

목화가 만개(滿開)하면, 흰 꽃으로 돌아와 달밤이면 만발하여 높이 뜬 저 둥근 달도 미영 베 짜서 시집가라는 듯이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다. 목화가 한없이 활짝 피어 초록 바다가 하얀 눈 덮인 밭으로 변하면 보자기 들고 골마다 줄 따라 서서 새하얀 꼬투리 목화를 따낸다. 보송보송한 새하얀 목화가 망태에 가득 담길 때쯤이면 저 멀리 동네 총각들이 목화 따는 처녀들 얼굴을 훔쳐본다. 혹시 그 목화 따서 시집가려거든 나에게 오라고 말이다. 그 목화 따는 처녀 알아차렸는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고만다.

목화는 따서 말려야 한다. 멍석에 깔아 놓은 새하얀 목화가 햇빛을 받아서 더욱 희다. 이 목화 말려서 꼬투리에서 목화를 뜯어내고 씨아로 미영 씨를 뺀다. 그 미영 씨 뺄 때 씨아에서 나는 소리는 마치 사랑하는 꼬투리와 헤어지기 싫어서 빽빽 목쉰 소리를 낸다. 어머니가 밤새 씨아로 미영 씨를 빼내면 이내 솜들이 보송보송한 흰 눈밭으로 소복소복 쌓이게 되고 만다.

어머니는 목화를 곧장 들고 시장 입구 솜 타는 집으로 간다. 솜 타는 공장에서는 큰활처럼 생긴'솜활'로 모아온 목화를 퉁기면 목화는 흰 구름 솜으로 변한다. 이것을 한 장 한 장 꼭꼭 눌러 주면 정말 종잇장처럼 압축되어 집으로 돌아온다. 들고 오는 솜은 부피만 있지 하늘을 날듯 가볍다.

솜은 시집갈 누이의 이불감 속통으로 들어가고, 새 옷감을 만들 것은 물레에 실을 잣게 한다. 바로 빙글빙글 돌아가는 물레로 솜을 자으면 흡사 아이스케키와 같은 미영 가락이 되고 만다. 우리 경주에서는 이것을 '고치'라고도 하였다.

실을 뽑아 베틀에 걸고 바디가 쉴 새 없이 왔다 갔다 하면 여인의 짚신이 겨우 내내 들락날락하여서 미영 베가 탄생한다. 매끈한 비단은 아니지만, 지금의 광목같이 우툴두툴하지만 어머니가 만들어 낸 예술품인 미영 베 한 필(疋)이다. 폭은 좁아도 서른 석 자 배 한 필이면 그 무엇과도 안 바꾸었다.

베틀에서 분리되면 빨아서 풀 먹여 다림질하여 옷감인 미영 베가 된다. 누가 이런 우리나라 가가호호(家家戶戶) 방직기술을 예술이라 하지 않으리. 그것도 농사철엔 농사짓는 것 도와주고, 엄동설한 겨울 동안 아녀자로 놀지 않고 부지런히 개미처럼 일하여 얻은 생산품이다. '엄마표 예술품 미영 베'가 아니던가?

이영백(대구 수성구 상록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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