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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춘추] 안동차전놀이

▲권 영 시
▲권 영 시

내가 다닌 중학교는 해방 그 이듬해 개교했다. 명문교였던가? 유학생이 무척 많았다. 태화봉 아래 노천강당도 유명했고, 넓은 운동장이며 모든 시설은 다른 학교에 비해 월등했다. 게다가 본관 앞에는 정원수를 끼고 석재 스탠드가 동서로 끝까지 설치돼 있었고, 운동장을 돌아가며 거대한 양버즘나무가 그늘까지 만들어 줬다. 그 옛날 경북북부지역 시군대항체육대회는 주로 안동에서 열렸다. 공설운동장이 없었던 시대에 우리 학교는 어련히 그 대회장을 대신해 줬다.

당시 학교에선 5년마다 운동회를 열었다. 마침 2학년 때에 그 기회가 왔고, 3학년 때는 경북북부지역 시군대항체육대회에서 안동의 차전놀이를 처음 등장시켰다. 당시 연습시간이면 반백에 양복차림을 한 어른이 직접 운동장에 오셔서 전수 지도하셨다. 그땐 대동놀이 편싸움으로 동채싸움이라고 했다.

동채는 통나무 껍질을 벗겨 자른 길이 6, 7m의 나무 두 개를, 앞부분은 서로 간 동채가 끼워지게 짧은 가위 형태로 수평지게 묶었고, 차츰차츰 뒤로 벌려가면서 후미 폭은 2m 정도 되게 하고, 중간에 X자로 고정해 묶었다. 중앙에는 대장이 올라서서 진두지휘할 수 있는 발판을 놓았다. 대장은 의관을 갖추고 동채에 올라가 밧줄을 잡고 상대방을 향한 공격과 반격을 진두지휘했다.

머리꾼은 하얀 한복에 짚신을 신었고, 우리는 검은 스타킹을 묶어 쓰고 상투를 대신 틀었다. 동채 앞에서 팔짱을 끼고 상대방의 공격 틈을 모색하면서 대장의 지시를 따른다. 동채를 멘 장정들도 대장의 지휘에 따라 이동한다. 동부와 서부로 나눈 한판 승부에서 동채를 누른 승자는 짚신을 하늘 높이 던졌고, 패자는 짚신으로 땅바닥을 내리치며 한탄하는 등 구경꾼을 감흥시켰다.

그해 가을, 우리는 졸업을 앞두고 수학여행을 경남 충무(현재 통영)로 떠날 참이었다. 마침 남산야외음악당에서 전국민속경연대회가 열려 서울로 가 대회에 참가했다. 당시 안동민속차전놀이로 출전해 한판 승부를 겨뤘지만 아쉽게도 대통령상은 놓치고 국무총리상을 받았다. 그 후 우리는 졸업하고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3학년 여덟 학반 500여 명 중 많은 인원이 지역의 인문계 한 곳으로 진학했다. 차전놀이는 그로부터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넘어가게 되었고, 이게 바탕이 되어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공식 명칭은 '안동차전놀이'가 되었다.

후삼국시대 안동 고을의 삼태사는 김선평, 권행, 장정필이다. 세 분은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후백제 견훤을 물리쳤다. 당시의 전승을 기념하기 위해 정월 대보름에 벌였던 차전놀이는 1969년 1월 7일 중요무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됐다. 반세기 앞의 학창시절 그 기억이 새롭다. 동채싸움은 역사성 있는 민속놀이이자 예술이다.

<시인·전 대구시 앞산공원관리사무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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