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진이 일본 후쿠시마(福島)를 찾은 날,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봄을 재촉하는 비가 대지를 적시고 있었지만, 이곳은 봄을 기다릴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일어난 지 4년. 그 상처는 아직도 치유되지 않은 채 아픔만 키워가고 있었다.
방사능 공포를 피해 현재도 피난 중인 주민 수만 11만9천 명이다. 고향을 등진 채 떠돌고 있는 이들이 언제쯤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정부의 대피령으로 인해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지대도 267㎢나 된다. 서울(605㎢)의 절반, 대구(884㎢)의 3분의 1 넓이의 땅이 버려진 채로 있다.
일본 정부가 제염(除染'방사성 물질을 제거함)작업에 안간힘을 쏟고 있지만, 워낙 지역이 넓고 돈이 많이 들어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문명사적 대재앙이라고 했다. 그만큼 방사능으로 인한 피해는 무섭고 처절했다.
◆복구는 아직도 시작 단계
후쿠시마역에 마중나온 후쿠시마교직원조합 세키야 히데키(關谷英樹'45) 씨의 손에는 휴대용 방사선측정기가 들려 있었다. 측정기에는 방사선량이 0.08마이크로시버트(μSv)로 표시돼 있었다. 사고가 난 후쿠시마 제1원전과 60㎞ 이상 떨어져 있는 곳인데도, 도쿄(0.03)보다 2배 이상 높았다.
지난 4년간 원전재해대책위원으로 활동한 수학교사 출신의 세키야 씨는 "얼마 전만 해도 현재의 방사선량보다 서너 배 높았는데 제염작업이 진행되면서 많이 낮아졌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는 제염작업이 도로, 주택에서만 이뤄지고 있을 뿐, 오염도가 높은 산과 들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후쿠시마 시내를 벗어나 오염지역으로 다가갈수록 방사선 수치는 급속하게 높아졌다. 0.10→0.14→0.45μSv. 일본 정부의 안전기준치인 시간당 0.3μSv를 훌쩍 넘어섰다. 주민들이 모두 피난한 이타테무라(飯館村)에 들어서니 2.08μSv까지 높아져 있었다. 이 마을은 원전과 40㎞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지만, 바람 방향 때문에 방사선 수치가 크게 높아지면서 피난지역이 된 곳이다.
마을 앞에는 길과 농토, 학교운동장 등에서 걷어낸 오염된 흙더미가 검은색 포대에 담긴 채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일부 폐기물은 방염복과 마스크를 쓴 인부들에 의해 옮겨지고 있었고, 일부는 찢어진 포대 사이로 오염된 흙이 새 나온 채 방치돼 있었다. 오염 지역이 워낙 넓다 보니 아무리 많은 복구 노력을 하더라도 한계가 있는 듯 보였다.
세키야 씨는 "논과 밭에서 흙을 걷어내고 나니 마치 학교 운동장처럼 변했다"면서 "주민들이 돌아와도 다시 농사를 지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제염작업을 끝낸 농토는 그나마 일부에 불과했고, 대부분 농토는 어른 키만 한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채 버려져 있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유령마을'
미나미소마시(南上馬市)를 지나 길가의 방사선 수치가 궁금해 측정기로 재어보니 2~3μSv가 나왔다. 마을 안쪽의 풀숲에 갖다대니 12~14μSv가 표시됐다. 저 멀리 보이는 논에 다가가 더 측정하려다 겁이 나 그만두고 말았다. 세키야 씨는 "오늘은 비가 와 이 정도지, 평소에 비해 낮은 편"이라며 "마을 뒤편 숲으로 가면 100 이상 나올 것"이라고 했다.
지난해 10월 개통한 조반고속도로를 타고 나미에정(浪江町)에 도착했다. 명색이 센다이~나미에정까지 연결되는 고속도로인데 다니는 차가 거의 없었다. 방사능 공포 때문이다. 정(町)이라면 우리의 면(面)과 비슷한 규모다. 이곳은 원전과 직선거리로 15㎞ 떨어져 있는데 방사능 때문에 3시간 이상 머물지 못하게 돼 있다.
마을에 들어서니 집 입구와 골목은 모두 철제 바리케이드로 막아 사람 출입을 못 하게 해놓았다. 텅 빈 마을에는 취재진뿐이었다. 노인들이 담소를 나눴을 길가의 긴 의자는 지저분하게 버려져 있었고 아이들이 뛰어놀았던 학교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일본식 2층 목조 주택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지만, 집이 군데군데 부서져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괴기스럽고 공포스러웠다.
4년 전만 해도 2만 명 가까운 주민들이 삶을 일궈가던 곳이었는데 방사능으로 인해 사람 한 명 살지 않는 '유령마을'로 변해버린 것이다. 이런 모습의 마을(자치단체)이 후쿠시마에만 8곳이 있다. 일부 지역은 정부가 제염작업이 끝났다며 귀향을 권유하고 있지만, 나이 든 노인을 제외하고는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나미에정을 나와 국도 114번 도로를 타고 원전 쪽으로 가다 보니 방진복과 마스크를 쓴 경비원들이 '통제구역'이라며 출입을 막았다. 별도의 허가와 방진장비를 갖추지 않는 한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이었다.
◆집으로 가고 싶지 않다
미나미소마시 데라우치 가설주택에서 만난 몬마 사다이치(門馬貞一'72) 씨는 얼굴에 피난생활의 고단함이 가득 묻어 있었다. 그는 "이제 그만 떠돌고 싶다. 빨리 안정된 삶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일어난 다음 날부터 자신의 집이 있는 나미에정 우에노하라 마을을 떠나 몇 달간 부인, 아들과 함께 4, 5곳을 전전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인근 지역의 학교 체육관, 여관에서 숙식을 했는데 그곳에서도 대피령이 내려져 계속 옮겨다닐 수밖에 없었다. 2년 전 이곳 가설주택에 힘들게 입주했는데 너무 좁고 불편해 몸이 아프다고 했다. 아무리 선진국이라고 하지만, 피난민들의 애환은 어딜 가나 비슷해 보였다. 가설주택은 방 1칸과 주방, 화장실이 전부였다. 16㎡(5평) 남짓한 크기에 나무로 얼기설기 지어 놓았다.
그는 "예전에 살던 2층 집은 멧돼지와 쥐가 들끓는 곳으로 변해버렸고 방사능이 두려워서 이제는 돌아갈 수도 없다"며 "공영주택 입주를 신청해 놓았는데 2년 가까이 기다려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데라우치 가설주택 강당에서 입주민을 위한 쉼터를 운영하는 마쓰노 미키코(松野 美紀子'43) 씨는 "2, 3년 전만 해도 피난민이 너무 많아 이런 가설주택에 들어오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고 한 집에 5, 6명이 살기도 했다"며 "이제는 정부의 가설주택 공급이 늘어났고 공영주택을 얻거나 친척을 찾아 떠나는 분들도 많아졌다"고 했다.
4년 전 방사능을 피해 두 아이를 홋카이도로 피난시킨 경험을 가진 그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더 고통받고 눈물을 흘려야 이런 비극이 사라지겠는가"라며 "이런 위험한 원전을 유치하거나 건설하는 것에 대해 결단코 반대한다"고 했다. 원전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인가. 섬뜩하고 무시무시한 공포에 압도된 날이었다.
후쿠시마에서 박병선 기자 lala@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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