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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한 사람도 투표 참여?…40년 쌓은 情 돈 앞에서 깨져

영천시 북안농협 입구에서 농민들이 전국동시조합장선거 출마자들의 포스터를 바라보고 있다. 매일신문 DB
영천시 북안농협 입구에서 농민들이 전국동시조합장선거 출마자들의 포스터를 바라보고 있다. 매일신문 DB

농'수'축'임협 조합장선거가 사상 처음으로 동시선거로 진행되면서 이번 선거는 전국적으로 큰 관심을 불러왔다.

이런 가운데 경북도 내 23개 시'군을 담당하는 매일신문 기자들은 지난 몇 달 동안의 선거 과정을 보면서 동시조합장선거가 많은 문제를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현장을 목격한 기자들의 입을 빌려 조합장선거의 문제점을 들여다봤다.

◆무자격 조합원 많아 당선무효 가능성

-김천시의 한 농협 관계자 얘길 들어보면 조합 설립 당시 쌀 몇 포대, 쌈짓돈 조금씩을 낸 고령의 조합원들 중 자격 미달인 이들이 있어 조합원 자격을 박탈해야 하지만 그대로 둔 경우가 많았다. 선거에 나선 후보들이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근소한 차이로 떨어지게 되면 문제로 삼을 가능성이 크다.

-무자격 조합원 문제는 예견돼왔다. 전국조합장동시선거를 앞두고 자격 없는 조합원 정리를 소홀히 해 조합마다 평균 10% 이상 무자격 조합원이 있다는 것이 농협 관계자들의 얘기다.

-농협중앙화는 조합법 내규에 따라 지역농협이 매년 한 차례 조합원 자격 실태조사를 벌여 무자격 조합원을 정리하도록 권고해 왔지만 이를 지키지 않아 논란을 키웠다. 이 때문에 대다수 조합은 이번 선거를 앞두고 사망한 조합원 상당수에게도 투표권을 부여, 부실한 선거인 명부를 작성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구미의 모 축협 관계자 얘길 빌리면 조합원이 사망할 경우 즉시 조합원 탈퇴 조치나 상속자에게 승계해야 하지만 행정기관에 사망신고 하듯 간단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처리가 매끄럽지 못했다. 축산업 폐업신고를 하면 조합원 자격이 상실되지만 꾸준하게 조합을 이용할 경우 야박하게 조합원 자격을 박탈시키는 데도 한계가 있다는 것이 조합 관계자들의 한목소리다.

-일부 조합원은 수십 년 전 농업에 종사하면서 조합원 자격을 얻었지만 현재는 농업에 종사하지도 않으면서도 조합원 명단에 이름이 올라와 있다. 결국 조합장 후보들로부터 금품으로 표를 매수할 대상자로 분류되기도 했다.

-이번 선거기간 내내 경북도 내 곳곳에서 조합원 자격 시비 논란이 일었다. 특히 농지를 팔고 연고지를 떠나 대구 등지로 이사한 조합원들도 후보들의 권유에 못 이겨 투표장에 나타나는 등 조합장선거가 불합리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현직에 절대 유리한 선거방식, 깜깜이 선거 불러

-3'11 전국조합장동시선거가 '무관심'과 '과열'로 양극화하면서 '깜깜이 선거' 등으로 정책선거 자체가 실종됐다. 현행 '공공단체 등 위탁선거에 관한 법률'이 현직 조합장들에 유리한 반면 새롭게 나서는 신인(新人) 후보자들은 선거운동에 많은 제약을 받았다. 후보자 본인만 선거운동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예비후보 등록이 따로 없고 선거운동 기간이 13일에 불과하다. 또 후보자들의 정견이나 정책을 비교할 수 있는 공개토론회'합동연설회 자체가 금지돼 있어 정책선거 자체가 실종됐다.

-경산지역 한 농협에 출마한 후보 얘길 들어보니 조합장들은 후보 등록 전에도 조합원들의 연락처 등을 갖고 사전 선거운동을 할 수 있으며 행사에 마음대로 다닐 수 있지만 신인들은 꼼짝 못했다. 마치 100m 경주에서 현직 조합장은 수십 m 앞서 뛰는 격이었다. 정책선거, 공정한 선거를 위해서 예비후보 등록과 선거운동 허용, 후보자 초청 공개토론회 시행 등이 이뤄져야 한다.

◆순박한 농'산'어촌 민심 토막내는 나쁜 풍토 불러

-포항권 농'수'축협 조합원들 사이에서는 "안 나서는 게 상책"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조금만 선거에 관심을 가지면 온갖 구설수에 휘말리기 때문이다.

-탄탄한 지지세를 구축한 현 조합장에게 도전장을 내민 신인들은 13일간 얼굴알리기조차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 이러다 보니 상대 후보 흠집 내기가 극에 달했고 선거판이 농촌 민심을 토막내는 선거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인구 4만5천여 명의 성주 경우, 농협과 산림조합, 참외농협 등 11명의 조합장을 뽑다 보니 동네별로 민심이 갈가리 찢어졌다. 선거 때문에 평생 원수가 되고 있다는 말이 나돌았고 선거가 끝나더라도 갈등의 골은 회복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하소연이 쏟아져 나왔다.

-선거 때문에 고령읍 한 마을은 길 하나를 두고 주민들 간 막걸리도 한 잔 안 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일부 유권자는 후보 측근으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신고해 40년간 이어져 온 이웃 간의 우정을 깨기도 했다. 정말 살벌한 분위기였다.

-칠곡군 약목농협은 조합장에 출마한 6명 중 3명이 약목초교 43회 동기다. 초등학교 동기간의 반목을 불러왔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동명농협은 같은 농협에 근무했던 선후배가 양보 없는 경쟁을 벌였고, 가산농협은 같은 문중에서 2명이 출마, 선거 후유증은 피할 수 없을 전망이다.

◆정치판 고스란히 판박이 한 조합장선거

-안동의 조합장선거는 오래전부터 정치권의 대리전 양상으로 전개됐다. 볼썽사나운 일들이 자주 불거졌던 것이다. 특히 조합 통폐합으로 대부분 거대 조직화된 농협 조합장선거는 농촌 중소도시 성격상 지방선거와 총선 등 기성 정치판 선거와 뗄 수 없는 특수성이 있을 수 있다.

-선거 때마다 정치인들은 자기들이 지원하는 후보자를 내세우고, 조합원들을 유권자 편 가르듯이 갈라 세우는 행태는 이번 선거에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게다가, 일부 조합은 현직 조합장들이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조합원들에게 선심성 배당금 주기와 조합장 출마 계좌 강화 등 시스템을 슬그머니 바꿔버렸다. 이런 과정에서 소송이 제기되거나 대의원 총회에서 말썽이 일기도 했다.

-농촌 최대 농민조직의 일꾼을 뽑는 잔치판이 정치인들의 개입으로 얼룩지고 있어 안타깝다는 목소리가 선거 기간 내내 이어졌다. 상주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15개 농협에서 선거를 치렀다. 이 과정에서 농업의 발전과 농업인들의 권익을 위한 구심점이 되어야 할 농협이 선거 때문에 어수선해지고 선심성 사업이 남발됐다. 정치인들이 하는 행동을 일부 후보들이 고스란히 답습한 것이다. 결국 '무리수'를 둔 일부 후보들은 돈을 뿌린 혐의로 수사기관의 조사를 받고 있다.

-조합장선거나 중앙정치, 지방정치가 다를 게 뭐가 있느냐는 목소리가 많았다. 조합장을 뽑는 일까지 기성정치판의 폐해를 답습해야 하느냐는 안타까운 반응들도 수없이 들었다. 일부 농협에서는 지방선거판에 기웃거린 '꾼'들이 후보자들의 '선거 멘토'로 활동하고 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들려왔다.

경북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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